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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을 떠나온 노래
민호기 목사 mrmmad@hdjongkyo.co.kr
2018년 11월 28일 08시 41분 입력

종종 제자들이나 후배 사역자들에게 뻐기듯이 물어보는 게 있다. “나는 아는데 너희는 절대로 모르는 게 있어. 그게 뭘까?” 뜬금없는 질문에 후배들은 어이없어도 하지만, 정답을 공개하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부러움과 존경의 눈빛을 총총 보내온다.

민호기 목사
찬미워십 대표
소망의 바다
대신대학교 교회음악교수

  

정답이 궁금하지 않으신가? “내가 노래를 부르다가 마이크를 회중에게 넘기면 다 함께 내 노래를 합창하는 걸 지켜보는 짜릿함~” 음악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요 자랑의 면류관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내가 만든 노래를 많은 성도가 함께 부른다는 것이다.

예배 혹은 예배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관심을 가지는 세계적인 예배인도자들이 있을 것이다. 돈 모엔, 론 케놀리, 폴 발로쉬, 매트 레드만, 팀 휴즈, 달린 첵, 이스라엔 호튼, 크리스 탐린, 마틴 스미스, 그래함 캔드릭, 앤디 팍, 마틴 니스트롬, 르우벤 모건, 조엘 휴스톤, 마티 샘슨, 브라이언 덕슨, 밥 피츠, 링컨 브류스터, 데이빗 크라우더, 브라이언 존슨...

소위 세계적인 예배인도자, 혹은 한국을 대표하는 예배사역자라고 인정하는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라. 그들을 ‘세계적인’이라 칭하고, 그들에게 우리를 ‘대표하게’하는 근거는 도대체 뭔가 말이다.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그들의 외모와 이미지, 그들의 거룩하고 고결한 삶의 태도, 그들의 음악성? 물론 나는 그들이 훌륭한 신앙과 인격의 소유자들이라 믿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100% 신뢰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많은 음악 사역자들이 스캔들로 넘어지기도 했다.

미안하지만 음악성 자체만 두고 본다면 그들보다 훌륭한 뮤지션이나 음악사역자는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인정하는 이유를 한 가지만 꼽으라면 바로 그들에겐 ‘자신만의 예배의 정의(定義)’가 있었고 그들만의 골방에서 그 예배의 정의로 노래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Don Moen에겐 ‘God Will Make A Way(나의 가는 길)’가 되었다.

그분을 향한 사슴과 같은 갈급함으로 Martin Nystrom은 ‘AsThe Deer(목마른 사슴)’을 만들었다. 온 땅을 향한 강력한 선포와 외침으로 Darlene Zschech은 ‘Shout To The Lord(내 구주 예수님)’를 만들었다. 모든 것보다 뛰어난 십자가를 향한 사랑이 Paul Baloche에게는 ‘Above All(모든 능력과 모든 권세)’로 고백되었다.

예배의 중심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Matt Redman은 ‘The Heart Of Worship(찬양의 열기 모두 끝나면)’으로 노래했다. 예배에 대한 그들의 ‘정의(定義)’는 그들의 ‘노래’가 되었고, 그들의 골방을 걸어 나와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세계적인 메가 히트가 되어 우리의 교회와 예배 때 불리는 곡들은, 실은 삶 속에서 내려진 ‘그들만의 예배 정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도 그런 노래들이 있다. 고형원의 ‘부흥’, 하스데반의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 최덕신의 ‘그 이름’, 천관웅의 ‘밀알’, 한웅재의 ‘소원’, 그리고 필자의 ‘하늘소망’과 ‘십자가의 전달자’ 같은 노래들 말이다. 아무렇게나 끄적여 둔 글을 들고 골방에 들어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만들었을 때, 그 순간 그 노래는 세상 아무도 모르고 온 은하계에서 나만 아는 노래였다.

그런데 그 노래가 골방을 나와 세상을 향해 걸어 들어가 사람들에게 익숙한 친구가 된다. 처음 이걸 경험했을 때의 경의와 희열을 잊을 수 있을까? 나의 노래가 그들의 노래, 아니 우리의 노래가 된 것이다. 나는 몰랐다. 주일 오후 예배 때 목사님 설교를 듣다가 은혜를 받아 주보 한 귀퉁이에 적어 내려 간 노래가 내 평생을 끌고 가는 ‘대표곡’이란 게 될 줄은. <하늘소망>이 그렇게 태어났고, 알려졌다.

어느 큰 서점에 쓰여 있는 ‘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책을 만든다’는 문구를 ‘사람은 노래를 만들고 노래는 사람을 만든다’로 고쳐 적어도 무방할 것이다. 만들 당시에는 정작 크게 의미를 두지 못했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은 이 노래가 나의 삶을 이끌어 가고 있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스물다섯의 민호기가 가장 좋아하던 가사는, 첫 부분 ‘나 지금은 비록 땅을 벗하며 살지라도 내 영혼 저 하늘을 디디며 사네’ 의 시적 대구였는데, 마흔다섯의 민호기가 제일 좋아하는 가사는 후렴 부분 ‘주님 그 나라에 이를 때까지 순례의 걸음 멈추지 않으며’ 이다.

고고하게 살고 싶었던 인생의 길이 어느 순간, 더디더라도 화려하지 않더라도 끝까지 포기 않고 완주하는 것으로 상향조정 된 거다. 노래와 함께 삶도 자라난다. 그리고 이내 새로운 기도의 제목이 생겨났다. 수려한 멜로디와 고급스러운 화성과 세련된 리듬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 가사에 오롯이 집중 할 수 있는, 남녀노소 전 세대가 함께 고백하며 부를 수 있는 그런 노래를 많이 만드는 것. 삶이란 노래처럼 쉬이 불리지 않는 것이겠으나, 그런데도 소슬한 우리 삶에 노래가 있어 참 다행이다. 노래란, ‘부르고 새기며 보존하는 것’이기에, 노래가 우리 삶의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또 빛나게 해 주기에 말이다.

그렇게 작가 본인을 떠나 대중에게로 간 노래에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기도한다. 몇 해 전 낯선 전화가 걸려왔는데, 몽골의 찬송가 공회였다. 내가 만든 ‘십자가의 전달자’를 몽골 찬송가에 넣고 싶다는 요청이었는데, 이건 마치 100여 년 전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지고 찬송가가 만들어질 때 당시의 선교사들과 찬송가 작가들의 마음이 헤아려졌다고 할까.

이번 추석, 몽골에 초청받아 찬양선교사역을 다녀왔는데, 현지인 교회에 들어서는 순간 거짓말처럼 ‘십자가의 전달자’가 몽골어 찬송가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요한계시록 7장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으로부터 해방 받고 보좌를 향해 찬송하는 장면을 미리 본 것 같은, 형용하기 힘든 감격의 순간이었다. 물론, 이런 은혜로운 일만 있는 건 아니다.

고난 주간과 부활절을 지나고 난 뒤 ‘십자가의 전달자’의 저작권료가 평소보다 훨씬 많이 입금되었을 때 당혹감을 느낀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그에 동참하기 위해 만든 헌신의 고백이 자본주의 음악 산업 시스템 안에서 재화의 가치로 환원되다니, 뭔가 설명하기 힘든 죄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수익의 창출과 은혜의 창출은 정비례하는가, 반비례하는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렇듯 순수한 의도로 만든 찬양들도 저작권법과 상업 유통구조 속에 들어가게 되다 보니 순수하지 않게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Copy Right, 즉 저작권은 엄정해야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영감으로 노래를 만드는 찬송곡 작가들에겐 이 곡이 온전히 자신만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에게 지분이 있음을 인정하는 Copy Left 정신도 중요함을 기억해야 마땅하다.

그와 연관해서 우리가 교회에서 많이 불리는 노래들(‘히트곡’이라고 말해버리면 너무 속될까마는)이 탄생하는 과정에 몇 가지 제동을 걸고 싶어진다. 한국교회를 돌아다니며 찬양사역을 하다 보면 아쉬운 점이 있는데, 어느 교회, 어느 수련회를 가도 부르는 노래가 다 똑같다는 점이다. 그 공동체의 상황과 속한 교회나 교단의 신학적 고려보다 찬양곡을 선곡하는 이들이 선호하는 음악 사역팀의 색깔이 그대로 교회로 이식된다. 예를 들면, 성령론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고신 교단의 교회가 성령운동과 은사주의 색채가 강한 빈야드, 인터콥, 예수전도단 같은 단체에서 만든 찬양을 아무 거부감 없이 부른다.

“(찬양곡) 레퍼토리는 신학이다”라는 그레그 시어(Greg Scheer)의 말이 무색하도록, 목회자들은 이런 면에 무관심하고, 마치 유행가에 반응하듯 개 교회의 예배인도자들은 유명한 예배팀의 새 앨범만 기다리다가 그것이 유일한 공급처인 양 예배로 같은 노래들을 흘려보낸다. 당연히 이런 영향력을 가진 팀이 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나, 어느 정도 알려지면 한국 교회는 답습적으로 그 팀의 노래들을 수용해 버린다.

최근엔 SNS와 유튜브 등의 영향으로 노래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가 가까워진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대세에 휘둘리는 것 또한 더 쉬워진 경향이 있다. 최근에 필자가 만든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라는 노래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 디지털 음원 발매 후 입소문이 나고 유튜브 등의 다양한 채널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하자 규모가 큰 교회들에서 불리기 시작했다.

이름이 알려진 교회들에서 부르는 예배실황 영상이 몇 개 뜨고 나자 조회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이는 큰 교회의 예배 실황을 모니터하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방증한다. 유명한 교회가 하는 걸 따라 하는 것을 안전한 선택으로 여기는 교회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알려진 노래가 더 많이 알려지는 건 쉬운데, 알려지지 않은 노래가 사람들의 눈에 띄는 건 정말 어렵다.

노래가 널리 알려진다는 것은 특별하고도 감사한 일임에 분명하지만, 노래가 알려지지 않았다 해서 그 가치가 작아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무도 몰라주지만 정말로 귀한 노래들이 많이 있고, 대중에겐 외면받았으되 소수의 누군가의 인생을 뒤흔들어 그들을 통해 세상을 뒤바꾼 노래도 분명 있을 것이다. 골방을 떠나온 노래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지만, 어떤 노래들은 고요히 좁은 골목들을 거닐며 그 생명력을 전하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노래가 알려지고 불리는 것은 분명 작가 개인에겐 감사요 축복이지만, 그와 별개로 노래를 수용하는 공동체의 태도는 조금 달라질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곡의 천편일률성을 깨뜨리는 것이야말로 예배 인도자의 중요한 자질이다. 팝과 클래식, 고전과 현대, 찬송가와 복음성가, CCM과 워십 곡을 종과 횡으로 넘나들고 가로 지으며 편집의 기술을 발휘해야 한다.

성경적, 신학적 엄밀함으로 선곡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보석 같은 노래들을 발견하고 발굴해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새 노래를 부르라”는 성경의 조언에 조금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겠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불리는 예배 곡들이 그 노래를 만든 이들의 예배에 대한 정의였다면, 당신의 삶과 당신이 속한 공동체에도 당신들만의 예배의 정의가 필요하다. 그렇게 정의되고 고백되어진 노래라면 그 어떤 메가 히트 워십송보다 위대한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나는 감히 당신만의 예배 곡을 만들어 보기를 권해드린다. 음악적 완성도나 예술적 가치로 가늠할 수 없는 높은 곳을 엿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골방을 나온 노래가 당신의 공동체 예배에서 불리며 드려지기를 기대해본다. 유명해지든 유명해지지 않든 그 노래는 이미 주님의 거룩한 보좌 앞에 다다라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