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타인으로부터 과도한 찬사를 요구한다. 고로 이 심리적 병은 청중 없이는 못사는 병(病)으로 알려져 있다. 인격적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이겠는가? 상대를 나처럼 한 인격으로 존중한다는 의미 아닌가? 그러나, 자기애적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그런 배려가 없다. 마음에 그런 배려심이 없으니 행동의 배려도 없다. 철학자 칸트I(. Kant)는“당신이 스스로를 목적으로 대하듯 타인도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라는 금언을 남겼다. 결국 우리가 누군가를 목적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결국 수단으로 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애적 인격장애자들은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 자들이 많다. 그래서 청중은 그런 사람을 주목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인격장애자들에게는 청중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반영해주는 “완벽한 거울”이 되는 것이다. 자기애적 인격장애를 다룬 〈투 다이 포(To Die For)〉라는 영화가 있다. 할리우드의 미녀 배우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이 영화에서 니콜은 지방의 무명 기상캐스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미국 최고 방송사의 인기 있는 기상캐스터가 될 것이라는 야망을 갖고 자신이 사는 지방의 한 유지의 아들과 정략결혼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를 갖고 싶다는 남편을 혐오하다 나중에는 불량한 십대들과 어울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에게 빠진 한 소년을 꾀어 자기 남편을 살해하게 한다. 이 사건은 지방의 큰 뉴스거리가 되었고 사람들이 니콜이 사는 집 앞에서 미망인의 슬픔을 취재하려고 모여들었는데 자기애적 인격장애자인 니콜은 창문 너머로 사진기를 든 기자들이 몰려든 것을 보고 화려한 옷을 입고 선글라스에 음악을 틀어놓으면서 구름 위를 걷는 듯한 표정으로 집을 나온다. 펑펑 플래시가 터진다. 그 순간은 마치 자기가 미국의 스타가 된 듯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남편의 죽음조차 자신의 명성을 드러내려는 도구로 삼은 것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주 밑에는 교주를 숭배하는 추종자들이 있다. 그 사람들 대부분은 역기능 가정 출신이며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다. 그리고 가난하고 삶의 막장까지 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뭔가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 그곳까지 오게 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교주는 그런 사람들의 아픔이나 사연이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그들이 돈으로 보일 뿐이며,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먹이로 보일 뿐이다. 자기를 찬양하기 위해 모인 박수부대처럼 생각한다. 이단일수록 한 영혼 혹은 한 개인보다 늘 집단에 목숨을 건다. 그래서 큰 체육관에서 대규모 집회를 즐긴다. 그 많은 돈은 자기 주머니에서 나가는 것도 아닐 텐데 돈을 펑펑 써댄다. 물론 명분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일 것이다. 그러나,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에게 화려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은 오히려 역정을 내셨다. 고아와 과부가 한숨을 쉬고 피눈물을 흘리는데 무슨 화려한 제사를 드리느냐 말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강대국을 일으키셔서 그런 부패한 자들의 제사와 성전을 쓸어버리신다. 공의가 빠진 제사는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세 번이나 배신했던 수제자 시몬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자 시몬이 답했다. “주께서 아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예수님은 양들이라 하지 않으시고 양, 어린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참고로 어린 양은 풀을 먹으면 죽는다. 젖을 먹어야 산다. 젖이 무엇이겠는가? 리더의 눈물과 땀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자기애적 인격장애를 가진 교주나 보스들은 사람들에게 쉽게 풀을 먹이려 든다. 풀을 먹이고 살찌게 만들어 잡아먹으려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자기애적 인격장애자들은 사람들을 어떻게 선동하고 조종해야 할지를 알고 있다. 심리학이나 상담학에서도 그런 성격의 사람들이 상담자가 되려 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많은 훈련을 받는 상담보다 사람을 쉽게 통제하고 조종하는 최면술 같은 것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단 한 방에 사람의 문제를 치유하여 용하다는 소문을 내고 돈을 받아낸다. 사이비 상담자들이다. 이처럼 이들은 대인관계가 착취적이고 조종적이다. 사람을 이용하려 든다. 그에게 타인은 자기의 필요 때문에 봉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타인을 고유한 존재 즉 ‘Being’으로 보지 못한다. 4) 공감(Empathy) 능력의 결핍이다. 이것은 자기애적 성격을 지닌 사람들의 결정적 특징이다. 이들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 이들은 왜 이런 심리를 형성하게 되었을까? 기질적인 면을 강조하는 학자들도 많지만 나는 기질보다 후천적인 육아 환경에서 그 원인을 찾고 싶다. 쉽게 말하면 공감해 준 엄마 밑에서 공감하는 아이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아기가 울적에 엄마는 아기가 왜 우는지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필요를 채워주는 일을 반복한다. 이를 토대로 아기는 흔히 말하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의 감정을 배우게 된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인지상정의 감정을 심리학에서는 “정신화”(mentalization)라고 부른다. 정신화는 공감이 공감되기 위한 재료와도 같은 심리적 기제이다. 그러나, 정신화가 되어 있지 않으면 공감 능력은 저하될 수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부모로부터 받은 것을 줄 수 있다. 자녀에게 주든 타인에게 주든, 사람은 받은 것을 주게 되어 있지 받지 못한 것을 줄 수는 없는 법이다. 이렇듯 자기애적 인격장애자들의 성격적 원인이 하나같이 유아 시절, 그 아기를 돌본 부모 특히 엄마에게 있다고 보이는데 이런 진단이 불편하게 느껴질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진단하는 것이 흔히 말하듯 “부모 탓”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실 어느 한 가지의 원인만 갖고 자기애적 인격장애자가 태어나지는 않는다. 엄마가 우울하다 하여 다 히틀러 같은 자로 자라지는 않는다. 분명히 개인의 왜곡된 의지와 사상, 그릇된 선택이 종합되어 그런 괴물이 태어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앞으로 강조할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경험도 교주적 성격을 형성하는 중요한 축이 된다. 기독교는 이런 모든 현상을 “죄”라 부른다. 죄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정신분석이나 애착 이론에서 말하는 유아 시절의 중요성 역시 간과해선 안된다고 주장하고 싶다. 모든 것은 모두 다 그럴만한 원인이 있다. 원인을 살피면 원인이 변화해가는 과정과 그 결과를 볼 수 있다. 자기애적 인격장애를 연구하기 위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가 좋고, 수용적이며 사랑받고 인정받고 자란 성품 좋은 아이가 갑자기 인격장애자로 변질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많은 감정이 있겠지만 나는 그 근저에 반드시 “공감”이라는 감정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공감은 상담 기법이 아니다. 공감은 사람이 사람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감정이며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관계의 중심인 친밀함을 가능하게 만드는 핵심 감정이다. 어떤 차원에서는 자기애적 인격장애자들은 자기밖에 믿을 대상이 부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감이라는 감정이 필요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 관계란 수직적 관계가 전부다. 그래서 그들 주변에는 추종자는 있으나 친구가 없거나 적다. 친구가 있다고 해도 마음을 나눌 정도는 아니다. 일로 만난 계산적인 관계만 존재할 뿐이다. 공감이 안 되는 사람 주위에 누가 남아있겠는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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