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데릭 레드먼이라는 영국 육상 선수가 출전했습니다. 그는 1991년 도쿄 세계선수권대회 16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땄던 강력한 우승 후보였습니다. 사람들의 환호와 흥분 속에서 총성이 울림과 동시에 선수들은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선수들 중간쯤 달리던 데릭이 잠깐 멈춰 섰습니다. 그동안 자주 말썽이었던 아킬레스건에 문제가 생긴 것이죠.
TV 속의 카메라에는 1, 2등의 선수들만을 비추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데릭에 대해서 주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등이 결승선을 통과하고 카메라는 곧이어 멈춰서 있는 데릭을 향했습니다. 시간은 꽤 흘렀고 데릭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죠. 관중들은 안타까움과 미묘한 감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데릭은 절뚝거리며 결승선을 향해 까치발로 뛰기 시작합니다. 완주하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데릭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 한 걸음씩 내디디고 있었지만, 곧 쓰러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중들은 안타까운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가 경기장에 뛰어듭니다.
수많은 관중을 뚫고 막아서는 사람들도 헤치고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데릭의 아버지였습니다. 트랙 안에서 만난 부자는 서서 함께 흐느껴 울었습니다. 곧 데릭은 아버지에게 몸을 맡겼고, 데릭의 아버지는 팔을 잡아 어깨에 두르고 그를 부축하여 함께 경기를 완주하는 것이었습니다. 6만 5000여 명의 관중은 ‘아름다운 완주’를 한 부자를 기립박수로 맞았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앞만 보고 가는 법을 많이 배워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알려준 대로 하지 않으면 마치 실패한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앞을 보고 열심히 달리는 법을 배우기는 했으나 멈추어 섰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교육 풍토의 결과인지 벌써부터 자신의 인생이 실패라고 느끼는 청소년과 청년을 보게 됩니다. “나는 성적이 올라가지 않아서”, “나는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해서”, “그 회사에 취직하지 못해서”, “ 유명한 사람이 되지 못해서” 등으로 신세를 한탄하며 그 자리에서 다시 걸어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합니다.
시간은 흐르고 몸은 자라지만 사실은 그 자리에서 멈추어 있는 것입니다. ‘효율’ 과 ‘경쟁’이라는 키워드에 꽁꽁 묶어버린 그들은 효율과 경쟁에 살아남지 못했음에 자신을 세상이 말하는 대로 ‘루저’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마치 베데스다에 앉아서 물이 동할 때 모든 병자가 첫 번째로 물에 들어가서 치료를 받고자 하는 치열한 경쟁시대와 동일하며, 그 자리에서 누구도 자신을 연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다고 신세를 한탄하는 38년 된 병자와 같이 불쌍한 경우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교회의 문화 안에서 그리고 자녀를 교육하는 방법에서 1등 하는 법,세상에서 성공하는 법, 이기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입니다. 신앙을 가진 부모들이지만 자녀를 교육하는 방법이 너무나 세속적입니다. 세상에서 원하는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큰일 날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일 수는 있으나,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오류를 낳는지는 아는 사람들은 다 압니다.
그러한 근거들은 좀 더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성경적인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할 것이며 세상에서 말하는 가치와 무엇인가 구별된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돌아보니 저의 인생에 이것저것을 가르쳐주었던 사람들보다 나의 실패에 함께해주었던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세상에서 나처럼 불쌍한 인생은 없다고 느끼고 살아가던 십대 때에 나를 격려해주시던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계셨습니다. 고3 수능시험을 두 달 남겨두고 교통사고로 대수술 후 17개월의 병원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나의 좌절에 손을 잡아주었던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가 수능을 치지 못하는 것, 대학에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가지셨지만, 그들은 저의 병원에 찾아와 치킨을 뜯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나의 팔을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주었습니다. 그냥 저와 함께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들 덕에 저는 다시 인생의 걸음을 시작할 용기를 얻었습니다. 비록 절룩거리는 인생이었지만 그들의 어깨동무로 인해 저는 다시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인생에 대한 걱정도, 수능 걱정도 건강에 대한 문제도 저에게는 더 이상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용기를 잃었던 저에게 자신의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통사고 후 저는 장애를 얻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뛰어서 남들을 앞질러 갈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더욱더 익숙해졌습니다.
1등이란 건 애초에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1등을 포기하고 아픈 다리를 이끌고 그 자리에 멈추어 보니 얻는 것이 너무나 많아졌습니다. 그중에서도 당연히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사람’입니다. 저에게 자신의 어깨를 빌려준 많은 사람 덕에 지금의 제가 있게 된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저는 여전히 상위권의 사람이 아니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목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완주’입니다. 혼자서는 결코 완주할 수 없는 부족한 자임을 알기에 더욱더 주위 사람들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소중히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다리의 온전함은 잃었지만, 훨씬 소중한 것을 얻은 것입니다. 아마도 그 자리에 멈추어 서본 경험이 없었다면 그 소중한 가치를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개인의 간증과 같을 글을 너무나 길게 적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다음세대를 향한 저의 교육목표의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는 ‘그들에게 어깨를 빌려주는 것’입니다. 다리는 튼튼하지 않지만, 어깨는 잘 키워 놓았습니다. 그들에게 저의 기준에 맞춰 잘하라고 닥달하지 않겠습니다. 성과와 결과 위주의 교육 방법으로 그들을 경쟁시키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들과 어깨동무 하겠습니다. 그들의 삶의 자리에 깊숙이 들어가서 함께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만나는 다음세대 아이 중에서 1등하는 사람보다는 느리더라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제주어깨동무학교 담당자답게 오늘은 ‘어깨동무’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인 부모님들과 교회학교 선생님들께 한 마디를 드리며 글을 맺을까 합니다.
“다음세대 아이들에게 우리의 어깨를 빌려줍니다. 비록 더디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