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했고, 사랑했던 이가 꼰대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더욱 슬픈 것은 스스로는 물론이고, 대다수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존경받음을 무기 삼아 아집과 교만만 남은 이들이 정치판과 교계의 중심에 서 있다.
시행과 착오
1. 탈퇴, 그리고 기록
이단에 속해 있다가 탈퇴한 이들의 피해와 회복, 그리고 신앙과 삶에 관한 책이 여럿 출간되었다. 환영한다.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의 탈퇴와 치유, 그리고 회복을 소망한다. 쉽지 않고 고단한 일이겠으나 탈퇴를 바라는 모든 이들의 건투를 소망하며, 본지도 년 초에 밝혔듯이 이단 2세, 3세의 탈퇴와 회복을 위한 일이 ‘현종공동체’의 존재의 목적과 이유라고 믿으며 여전히 애쓰고자 한다.
다만 조심스럽게 우려하는 것은 탈퇴자들이 그곳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겪었다고 해서 내용과 기억의 과장이나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형태의 꼰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탈퇴의 간증은 본디 선한 영향력으로 이어져야 하나 반대로 선의의 피해가 야기되는 일이 종종 있었기에 신중하게 기록되어야 함도 물론이다.
2. 온전한 회복
탈퇴 이후의 회복과 감사에 관해서는 매달 간증과 기획취재를 통해 나누고 있다. 탈퇴자들 대부분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눈물과 아픔 속에서도 수렁에서 빠져나오고자(또는 건져내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할 수 있는 한 모두가 한마음으로 이단 대처의 영역 안에 있는 회복의 문제에도 관심을 두길 바라며, 남은 이들의 탈퇴를 돕는 사역도 활성화되었으면 한다(그간 본지에 기사화된 내용을 참고하면 조금이나마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외 다른 문제를 한 가지 짚어보고자 한다. 그간 나누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이단 2세들은 그나마 순수하고 의로운 마음으로 이단 탈퇴 후에도 남은 이들을 걱정하고, 돌이키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적지 않았으나 성인인 경우에는 오랫동안 이단에 몸담았기도 했고, 그 외 여러 이유로 당장에 남은 이들을 생각할 여력이 없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탈퇴 이후에 남은 이들에 대한 회복 문제를 고민, 실행하는 것은 기본이 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그간 이단에 속해 있으면서 여러 사람을 포교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삶에 대한 회개와 반성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혹여나 문제의 해결 이후에 지긋지긋하기만 한 이단 문제에 더는 관여치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더라도 부디 한 번 더 생각해보고, 그 마음 거둬주기를 바란다. 문제를 겪어오면서 크나큰 아픔과 어려움이 있었겠으나 그래도 자기 일이 해결되었다고 해서 나머지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선언은 남은 이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탈퇴 이후에 지나친 관심과 섬김에 소영웅주의에 빠져 바로 간증 등에 투입(?)되거나, 내지는 매스컴과 세상의 주목을 받으면서 처음의 진정성이나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에 이러한 과 현상들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탈퇴자들이나 한국교회에 득이 아닌 독이 될 수도 있어서다.
한국교회의 일원이 된 것에 쌍수를 들고 환영해도 부족할 판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미안한 맘이 깊다. 그러나 이단에서 돌아왔다고 해서 그간 감사한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깊은 상처로 인해 교회를 포함해 어떤 것(곳)에도 마음 문을 열지 않거나 교제하지 않고, 홀로 세상 안에서만 싸우는 이들도 적지 않아서다.
더불어 탈퇴자들이 회복 사역에 직접적인 도움을 준 이들 외에는 신뢰와 믿음을 갖지 못하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부디 공식적인 탈퇴가 이뤄지고, 적절한 수순들을 통해 ‘모두의 하나 됨’이 있어지길 기대해 마지않는다.
3. 시행착오
최근 모 탈퇴자의 책을 접하면서 자존심이 무척 상한 일이 있었다. 그 일로 인해 이번 칼럼을 쓰게 되었고, 더불어 사역 초기 때의 일들을 떠올려보는 계기도 됐다. 그때가 20대 때였으니 일의 경중을 살피기 어려웠던 것은 물론이고, 매일 실수투성이였지 않았나 싶다. 또한 한계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특히 상담소나 회복 사역이 등장하기 전이었는데, 기억에 뚜렷한 것은 이단의 교주나 간부들도 그곳에서 쉽게 돌이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은 생각이었겠으나 간절한 마음으로 설득하고자 한다면 제대로 된 회복이나 변화의 결과를 안을 수 있을 거라는 순진하고 순수한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실제로 교주들과 만남도 몇 번 가졌다. 결과는 시행착오에 따른 아쉬움이 컸고, 본지만의 일이 아닌 한국교회 전체에 타격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지 못한 만남들이었지 않았나 싶다. 지금이야 여러 상황을 살펴본 후에 신중하게 문제를 풀어가는 지혜가 생겼으나 그때는 모든 것이 부족했을 때였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때의 어리석고 무모한 생각과 행동이 더욱 간절했던 것 같고, 또한 이단 피해자들을 위해 지금보다 더 열심히 기도하며 섬겼던 삶이었지 않나 싶다. 이단 대처의 스킬은 늘었으나 순수함은 사라지고, 사역의 세련됨은 더해졌지만 간절함은 사라진 지금과 비교해보면 더욱 그러하다.
위에 담은 것처럼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남을 가르치려 드는, 당당함과 자신감은 사라지고 늘 남의 눈치나 보며 사역하는 모습이 부끄러울 뿐이다. ‘꼰대스러움’은 본지에도 만연해 있다.
* 신천지의 이만희, JMS의 정명석, 다락방의 류광수 등 많은 이들을 만났더랬다. 직접 교주나 이단의 대표들을 만나 보니 신자들이 느끼는 카리스마보다는 야인 같은 느낌이 더 컸다. 차라리 최측근의 역할이 그 단체들에서는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무튼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내뱉는 모습들을 보며 거룩한 분노를 느끼며 굳이 만날 필요 없었고, 변화의 기대도 갖지 말아야 했으나 그래도 한 번쯤은 좋은 경험이었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만남 이후 교주는 몰라도 같이 동석했던 간부들과 신자들의 탈퇴 소식 때마다 간절한 소망과 기도에 따른 열매라 믿으며 기뻐했다.
그러나 한 면만 바라보며 비판이 아닌 비난을 해대는 일부 탈퇴자의 시선에는 너무도 자존심이 상한다. 누구라도 시행착오 이후에 더욱 건강한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응원해주고 동역의 길에 함께 나설 수 있다면 좋겠으나 때로는 아군까지 비난의 대열에 합류하기도 하니 아쉬울 뿐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살고, 사역하며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억울하고 속상한 일이 많다고 해도 그분만은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아울러 더는 실수와 한계 없이 기대에 부응하는, 더욱 진일보하는 사역으로 빚진 맘 갚도록 하겠다.
그들만의 리그 정치와 대선
정치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교회가 그 방향을 올바르게 잡아줄 수는 있으나 결코 교회가 정치에 앞장서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번 대선은 후보나 국민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선거가 되길, 정치와 이단의 커넥션 또한 더는 염려치 않을 수 있길 바란다.
* 이번만큼 선택의 폭이 좁은 선거가 또 있었을까 싶다. 시대정신은 사라지고, 엄한 것에만 관심을 두며 네거티브에만 열중하는 그들만의 리그에 개인적으로 투표 보이콧이라도 해야 할지, 내지는 후보 중에 그나마 좀 더 나은(내지는 좀 덜 나쁜) 이에게 투표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수천만이 사는 나라에 인물 부재의 한탄이 날로 더해지고 있다.
그렇듯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는(내지는 지나친 편승으로 인해) 꼰대들이 곳곳에 만연하다. 불의한 일에 목숨 걸며 예수의 길과는 정반대의 삶을 사는 이들, 반대로 의롭게 살고 있다는 교만과 자만이 득 대신 독이 되기도 한다. 일반적인 꼰대와는 그 결과 질도 다르다. 못나고 못된 정치인들로 인해 국가가 황폐해지고 마는 것처럼 종교계의 적폐이자 꼰대들로 인한 교회 개혁과 갱신은 여전히 후퇴 중이다. 이단이 나타나는 또 다른 이유와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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