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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함께한 박옥수를 떠난 이유
기쁜소식선교회 전 목회자 우승기 인터뷰
현대종교 | 김현빈 기자 gus147qls@naver.com
2025년 05월 12일 09시 00분 입력

초등학교 6학년 때 박옥수를 처음 만났다. 장로교 교단에서 목회하던 그의 아버지가 여름성경학교 강사로 박옥수를 초청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듬해인 1978년, 박옥수의 영향을 받은 그의 부모는 장로교를 떠나 기쁜소식선교회(박옥수, 기소선)로 들어갔다. 그는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고, 특별한 이유나 선택권 없이 부모를 따라 기소선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승기 목사는 30여 년을 박옥수와 함께하게 됐다.

 

▲기쁜소식선교회 부다페스트 성경 세미나 강사로 참석한 우승기 목사

 

박옥수를 만나다

기소선에 들어간 후, 우 목사의 부친은 장로교에서의 목회 경력을 인정받지 못해 기소선 신학교에서 다시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때 부친이 경남 산청으로 파송을 받았다. 당시 기소선은 인사이동이 잦아 목회자들이 1~2년 주기로 교회를 옮겨 다녔다.

그때마다 부모를 따라 전학을 반복할 수 밖에 없었고, 중고등학교 시절의 절반인 3년 이상을 박옥수 목사 사택에서 함께 살았다. 우 목사는 기소선과 초창기부터 함께한 사람이었고, 박옥수와 특별한 유대관계를 형성했다.

박옥수 부부와 가까운 사이였던 우 목사는 그들의 사생활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많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그들의 잦은 부부싸움이었다. 단순한 말싸움을 넘어서 난투극에 가까운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어린 나이에 그런 모습을 볼 때면 ‘결혼을 하지 말아야겠다’, ‘저렇게 살 바에야 결혼을 안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군 복무를 마친 1987년, 우 목사는 기소선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기소선 활동을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지속적으로 세뇌와 가스라이팅을 당한 영향으로 성인이 된 후에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깊은 고민없이 기소선에 순응하며 20여 년을 보냈다.

먼발치에서 바라본 기소선

 

▲어학원에서 독일어를 공부하는 우승기 목사

 

우승기 목사는 2000년 독일로 파송 받았다. 기소선의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괴팅겐에 있던 선임 목회자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선교사로 가기를 원해 괴팅겐의 자리가 비게됐고, 기소선은 우 목사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를 독일로 보냈다.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로 독일에 오게 됐다. 독일어도 하지 못해 한동안 영어로 설교하고 통역을 거쳐야 했다.

기소선의 영향력이 비교적 적은 타지에서 생활하다 보니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조금씩 뜨였다. 더 이상 어린 청년이 아니었고, 더디지만 조금씩 객관적으로 비교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기소선을 바라보자 조금씩 교단 내 문제가 보였다. 기소선이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 목사가 학생일 때 박옥수는 “복음적으로 출발했던 교회들이 다 변질되고 무너졌다”고 기성교회를 비판하며 “우리(기소선)는 복음적인 순수성을 잃지 말고, 주님 오시는 날까지 유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굉장히 자주 했다. 근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박옥수 자신 역시 스스로 이야기한 순수성과 초심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느껴졌다.

기소선의 문제점

기소선의 큰 문제 중 하나는 교단의 폐쇄성이다. ‘기쁜소식선교회’ 외에는 어떤 다른 교회도 구원이 없다는 입장이다. 복음과 진리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곳은 기소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폐쇄성이 굉장히 위험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주도하고 있는 박옥수와 그 옆에서 기생하며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는 목회자 그룹 역시 문제였다.

기소선은 굉장히 도전적으로 대규모 전도 집회 등을 많이 연다. 주 포교 대상은 기성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기성교회에는 복음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공격적인 포교 활동으로 인해 기소선 신도들은 자기 시간도, 돈도 없다. 모든 시간과 돈을 포교를 위해서 써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고 변절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초창기 박옥수 목사는 독재자처럼 난폭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절대적인 권력도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 반대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다 숙청하다시피 쫓아내거나, 아무런 영향력 없는 지역으로 좌천시켜 버렸다. 이런 상황을 보며 기소선이 잘못됐다는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개혁을 외치고 숙청을 당하다

이대로 가면 교단은 무너지고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개혁이 필요했다. 무조건 박옥수의 말에 복종하는 것이 아닌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조금씩 나타나기를 바랐다. 비도덕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비성경적인 부분들을 바로잡고자 했다.

그러나 기소선에서 그런 분위기는 용납될 수가 없었다. 마치 북한 사회에서 김정은에게 ‘우리 사회를 좀 민주적으로 운영을 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건의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개혁의 조짐을 감지한 박옥수는 강남교회 장로들을 동원해 우 목사를 출교시켰다.

2011년 2월, 박옥수는 서울, 경기지역의 지교회 목회자 4, 50명을 기쁜소식강남교회에 불러 모았다. 박옥수와 지교회 목회자가 둘러싼 가운데 우승기 목사가 앉아 있었다. 그 후 인민재판과 같은 심문이 아침·저녁으로 만 3일간 진행됐다.

박옥수는 3일간 여러 이야기를 했고, 우 목사는 박옥수의 모든 말을 성경적으로 반박했다. 박옥수의 말이 끝날 때마다 “목사님, 방금 하신 말의 근거 구절을 성경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했고 박옥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결국 박옥수는 “성경에 무어라 기록되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나는 이 선교회의 대표야. 그러니까 너는 성경과 상관없이 내 말을 들어야 해!”라고 짜증을 냈다. 자기 말을 듣지 않을 거라면 선교회를 나가라는 박옥수였다. 그 말을 듣고 ‘기소선에 더 머물면 안 되겠다, 박옥수 목사와 더 이상 엮이면 안 되겠다’고 확신했다.

기소선의 실상을 알리다

기소선이 왜 잘못됐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적어도 기소선 신도들에게는 알려야 되겠다는 책임감이 들었다. 기소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새롭게 유입될 사람들에게도 기소선의 실상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알고 있던 기소선 목회자 및 유관기관 직원들의 메일 주소로 사실을 알리는 내용을 보냈다.

 

▲‘부흥과 개혁’ 네이버 카페

 

기소선 측에서는 우승기 목사가 교회 건물을 욕심내 부동산을 횡령하려 했다고 그를 음해했지만, 우 목사의 메일을 보고 기소선을 나오게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후 2011년부터 약 1년 간 개인 블로그를 통해 기소선의 실상을 알렸다. 이듬해 블로그 글들을 통합해 ‘부흥과 개혁’ 카페를 개설했고 지금까지 카페를 통해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

기소선의 문제점을 깨닫고 기소선을 탈퇴한 목회자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기소선에서 겪은 일과 박옥수에 대해 함구했다. ‘부흥과 개혁’네이버 카페는 기소선의 실상을 이야기하는 몇 없는 창구였다. 기소선 입장에선 ‘부흥과 개혁’이 껄끄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카페의 게시물을 반복적으로 신고를 해 게시 중단이 되게 했다.

최근에는 기소선의 김○○이라는 인물이 우승기 목사를 고소했다. 고소를 당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김○○은 1990년대 기소선에 들어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기소선의 요직에 있었던 적이 없던 인물이다. 우 목사는 그의뒤에는 박옥수 목사와 그에 대한 충성심이 뛰어난 조○○ 목사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며, 고소를 통해 겁을 줘 우 목사의 입을 막으려는 의도로 해석한다.

우승기 목사는 기소선에는 박옥수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해도 의심 없이 믿고, 그를 이 시대의 유일한 하나님의 종으로 믿는 콘크리트 지지층이 있지만, ‘이게 과연 옳은 일인가?’ 고민하는 신도들도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가끔 ‘부흥과 개혁’ 카페의 글을 확인하기도 한다.

기소선이 고소를 통해 자신의 입을 막고, 카페 활동을 저지한다고 해도, 우 목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소선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더 크게 입을 열고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싸워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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