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천상천하(天上天下)의 하나님이신 박태선 장로님께서 이 세상 인류들에게 구원을 주시려고 이미 내려오셔서 계시는 곳이 있는데 속세에 사람들이 그곳을 모르겠거든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는 것이 있는 지명이 있는데 그곳을 예수를 믿다가 예수를 ○○○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天夫敎敎人)에게 물어보라는 뜻이다.1)
▲이종민 목사
사촌교회 담임
부산장신대학교 교회사 박사과정 |
신앙촌의 봉사대원으로 활동한 서만원은 ‘박태선은 천상천하의 하나님’이라고 줄곧 주장한다. 또한 “마지막 때에 박씨(氏)성을 가지신 하늘의 사람이 생명물을 가지고 와서 짐승의 마음을 가진 자들을 생명물로 변화시킨다”고 박태선을 신격화하고 있다.2) 이런 박태선은 1980년 1월 1일부터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를 탈퇴하여 ‘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를 신설하고 “기독교 성경은 98%가 거짓말이다”라고 주장한다.
본 소고는 한국 신흥종교 가운데 박태선의 ‘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에 대하여 연구한 것으로, 먼저 전도관의 역사를 통하여 교주인 박태선과 전도관에 대하여 살펴보고, 박태선은 어떤 신관을 가지고 있으며, 천부교의 주요 교리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고찰해 본다.
참고문헌
1) 서만원, 『한민족은 인류의 조상이다: 박태선 장로님께서는 천상천하의 하나님이시다』 (인천: 미래문화사, 1987), 16.
2) 앞의 책, 18.
Ⅱ. 전도관의 역사
1. 전도관의 태동기(1917~1956)
박태선은 1917년 평남 덕천군 읍남리 148번지에서 아버지 박영진(朴永鎭)과 어머니 김천태(金天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도박과 술로 탕진했고 가족을 돌보지 않았다. 이런 가정에서 그의 어머니는 신경쇠약으로 박태선이 9세 때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자 박태선의 형제는 고아가 되어 자신들의 고향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덕천교회 주일학교를 다녔다.
그후 개천교회로 옮겨 신앙생활을 하였다.3) 그가 16세 되던 해에 동경으로 건너가 중 · 고등학교를 마쳤으며, 그 기간 동안 사람들의 임종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한 예로, 한 장로가 임종하기 4~5분 전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되고 기쁨이 충만한 얼굴로 변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임종 후에도 시체에서 향취가 풍기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체험이 박태선으로 하여금 전도관으로 연결되는 터닝 포인트 역할을 하게 되었다.4)
이후 일본에서 귀국한 박태선은 남대문장로교회의 김치선 목사를 만나 그 교회에 출석한다. 이후 김성봉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하늘에서 내리는 뜨거운 불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5) 그리고 박태선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을 피해 자신의 집 구들장에 숨어지낼 때, ‘생수 체험’을 하게 된다. “기도의 도수가 찰 때 이상하게도 하늘로부터 오는 생수가 마시어지는 것이었다. 내 입으로, 내 코로 시원한 무엇이 흘러들어서 나를 시원케 하는 것이었다”라는 내용을 그는 설교 시간에 간증하기도하였다.6)
그가 체험한 생수 체험은 지금까지 천부교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종교체험으로 믿어지고 있고, 박태선으로부터 축복받은 “생명물”로써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또한 그는 평택 피난 생활 중에서 소위 “피가 바뀌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 내용인즉, “소변을 보다가 너무 많은 피를 쏟았다. 몸 전체 피의 이삼십 배가 되는 피를 쏟았는데도 힘은 점점 더 왕성해졌다.... 그 뿐만 아니라 피가 나올수록 생수가 마셔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피가 빠져나간 후 낮인데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내 피를 마셔라” 하시며 그 피를 내 입에 넣어 주시어 내 심장 속에 정하고 정한 주님의 보혈을 흘려들어 주셨다. 이는 물론 환상이다”라며 소위 ‘피가름’의 체험을 했다고 주장한다.7)
이와 같이 박태선이 경험한 “생수 체험”, “피가 바뀌는 체험”은 전도관 태동부터 지금까지 일어나는 대표적 영적 체험이며, 천부교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많은 영향을 지금까지 주고 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박태선은 창동교회로 옮겼는데, 이때에도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로부터 환한 빛이 내려 내 몸을 뒤덮었다. 내 위에 열린 하늘 문은 삼 일간 계속되어 열린 채로 있었는데, 삼 일째 되는 날에 ‘너는 나가서 나의 명하는 것을 행하라’는 음성이 들렸다”8)
박태선은 이 체험을 그의 사명자 인식이라고 여겼고, 자신의 향후 진로를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4년 12월 박태선은 김치선 목사의 후원으로 장로 안수를 받게 되는데, 이것은 당시 부흥사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나운몽 장로에 견줄만한 장로교회의 장로 부흥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부흥사로 활동하게 되었고, 1955년 3월부터는 주강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박태선은 집회에서 기성교회와 목회자들을 비판하였고, 안수와 안찰로 병자가 치료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이런 박태선을 향하여 김성여는 “기독교 2천 년 역사에서 처음 보는 신비”가 “전 세계 기독교 부흥사에 가장 호화로운 페이지를 남길 부흥사”이며,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사람”으로 소개했다.9)
이런 가운데 박태선은 부흥회를 통해 얻은 수많은 헌금을 부흥회 주최단체로 귀속시키지 않고 1955년 4월 8일 자신이 만든 “한국 예수교 부흥협회”에 귀속시켜 버린다. 이 단체는 그 후 1980년 8월 23일 “한국 천부교 전도관 부흥협회”로 명칭이 변경된다. 이런 과정에서 박태선은 새로운 교단 설립과 그의 설교 내용 중 이슬 은혜라는 “감람나무 발언”으로 이단 시비가 점점 커지게 되었고, 결국 1955년 11월 경기노회로부터 이단으로 결의되었다.10)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박태선을 추종하게 되었으며,“감람나무”, “이긴 자”, “동방의 의인”, “영모(靈母)님”, “말세의 의인” 등으로 불린 박태선은 자신이 사명자라는 것을 구체화하기 위해 천년왕국 신앙촌을 건설한다.
참고문헌
3) 탁명환, 『기독교 이단 연구』 (서울: 국제종교문제연구소, 1986), 162.
4) 김성여, 『박태선 장로의 이적과 신비경험』 (서울: 신천신지사, 1955), 30.
5) 앞의 책, 33.
6) 앞의 책, 63.
7) 앞의 책, 88~89.
8) 앞의 책, 57.
9) 앞의 책, 2~9.
10) 한국 천부교 서대문교회 청년부, 「청년의 터」 (1998년 추수감사절 특집호), 9.
2. 신앙촌 형성기
신앙촌의 의미는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박태선)을 중심으로 모여 죄와는 무관하여 함께 살아가는 곳”이라고 그들은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14만 4천 의인들의 지상천국 공동체를 의미한 것이다.11) 이와 같은 신앙촌은 기성 기독교의 공격으로부터 전도관 신도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신앙을 지키는 역할을 했지만 이후 박태선의 사망으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1) 제1신앙촌 시대(1957~1962)
제1신앙촌은 1957년 11월 1일 경기도 부천군 소사리 등지에 건립된 전도관 마을 공동체로서 소사신앙촌을 말한다. 박태선이 신앙촌 건립을 추진한 배경은 당시 전도관이 기독교 이단에 분류되어서이다. 당시 신앙촌에 들어 온 사람들은 박태선의 천년왕국건설과 구원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있었다. 따라서 교인들은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가족 전체가 신앙촌에 입주하거나, 부녀자들이 가족과 이별한 상태에서 홀로 신앙촌에 입주하거나 부녀자들이 가족과 이별한 상태에서 홀로 신앙촌에 들어온 경우도 상당수 있었다.
이들이 신앙촌에 입주하기를 원했던 한 가지의 소망은 천년왕국에 들어가 왕 노릇하기 위함이었다.12) 소사신앙촌이 건립하는 데에는 많은 신앙촌 신도들의 헌신이 있었다. 그들은 수만 명이 들어 갈 수 있는 신앙촌 건립은 기성교회들이 하지 못하는 일인데, 그들의 교주인 박태선이 이 일을 한다는 것은 그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이렇게 제1신앙촌에 입주하여 헌신하는 신도들의 열성을 지속시키고 가속시킨 것은 박태선의 안찰기도 덕분이었다. 신도들은 이 안찰을 받기 위해서 정신없이 노동에 참여했으며, 박태선은 신도들의 노동 현장에서 안찰해 주며 노동을 독려했다.13)
이런 가운데 소사신앙촌에도 시련이 찾아온다. 김순옥을 중심으로 부산동래온천 전도관을 뒤엎는 사건과 경기도의회가 신앙촌의 탈세 및 병역기피조장, 간첩출몰 우려 등이 농후하다고 발표함에 따라 박태선이 입건되어 유죄 판결을 받는다. 이 당시 신앙촌 입주자는 모두 7467명이었다.14)
참고문헌
11) 김성여, 『박태선 장로의 이적과 신비경험』, 118.
12) 천부교에서 발행하는 「신앙신보」에서는 소사신앙촌에 이렇게 소개한다. “소사신앙촌의 주택은 5, 60년대 외국인들이 관광차 들르는 명소가 될 정도로 국내에서 손꼽히는 주거 환경이었고, 소사신앙촌의 생산 공장에서는 생필품을 비롯해 100여 종에 이르는 양질의 제품을 생산하였다. 또한 2세 교육을 중시하셨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유치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신앙촌에서는 자유율법을 이루게 되어 있다” 하시며 그 본보기로 소사신앙촌에 세워 주신 ‘주인 없는 상점’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장신앙촌에서 이어지고 있다” 「신앙신보」 홈페이지, “신앙체험기 속의 천부교 역사,” https://theweekly.co.kr/ (2019년 5월 14일 검색)
13) “하나님(박태선)께서는 일이 끝나면 건설대원들에게 특별히 안수와 안찰을 해 주셨다. 안수와 안찰을 받은 건설대원들은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횃불을 들고 작업을 해도 피곤함을 모르고 기쁨이 넘쳐 서로 더 많은 일을 하려고 욕심을 부릴 정도였으니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건물이 몇 채씩 늘어나는 기적 같은 속도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건설대원들에게는 베이지색 남방과 멜빵바지를 작업복으로 맞추어 주셨고, 하나님께서도 똑같은 작업복을 입고 일을 하셨는데 그 모습이 흡사 하늘의 천사처럼 보였다고 한다” 「신앙신보」 홈페이지, https://theweekly.co.kr/ (2019년 5월 14일 검색)
14) 탁명환, 『기독교 이단 연구』, 166~167.
2) 제2신앙촌 시대(1962~1970)
이런 시련 가운데 박태선은 1962년 7월 21일 경기도 양주군 외부면 덕소리에 제2신앙촌 건립을 시작한다. 이때 자신이 두 차례 투옥된 데 대하여 사탄들에 의해 겪은 의인의 수난이라고 변명했다.15) 덕소리에 건립된 제2신앙촌에는 공장과 주택 67개 동으로 6000여 명의 신도들이 입주하였고, 경공업 위주로 사업했던 소사신앙촌과 달리 덕소신앙촌에서는 제강, 제철공업과 같은 중공업으로 확대하였다. 또한 신도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초중고교가 개교되었다.
덕소신앙촌을 둘러본 작곡가 안익태와 유석창 박사,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언론인 최은희 기자는 “이 신앙촌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나라의 보배”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16) 제2신앙촌에서부터 달라진 것은 ‘축복일’이 제정된 것이다. 이 축복일은 한 달에 한 번 전국의 신도들이 덕소신앙촌 집회에 참석하고 생명물을 받아가는 행사를 말한다. 이 때 박태선은 ‘감람나무’에서 ‘영모님’으로 불리었다. 그리고 ‘박태선의 말씀(?)’을 경전화 하는 작업을 시도하기도 하였다.17)
하지만 이 책은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4년 『하나님의 말씀』으로 출판된 천부교의 경전은 이 당시 사용되었던 『오묘』를 기초로 하여 박태선의 어록을 첨가하여 출판된 것으로 보인다.18) 소사신앙촌과 마찬가지로 덕소신앙촌에서도 시련이 찾아왔다. 1967년 1월 화재가 발생했으며, 그 해 여름에는 홍수피해로 신앙촌 공장이 물에 잠기고 말았다.
또 하나의 시련은 1969년 5월 딸이 위궤양으로 사망한다. 전도관 신도들에게 생명수가 만병통치약으로 알렸는데, 이런 일이 발생하여 자신의 지도력에 결합이 발생한 것이다. 박태선은 소사신앙촌 시기에 기성교회에서의 천부교 이단논쟁과 그의 반대파에 의해 두 차례나 투옥되면서 상실한 지도력을 회복하고자 덕소신앙촌 건립을 추진하였던 것인데, 이런 어려움은 덕소신앙촌에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3) 제3신앙촌 시대(1970~1980)
1970년 2월 28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770번지에 제3신앙촌을 건설한다. 이곳에는 자동차 부품공장, 제강공장 등 중화학공장 20여 개를 한국경제와 기독교 신앙을 돈독히 하는 업적을 쌓게 되었고, 시온식품과학고등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또한 박태선은 기장신앙촌 건립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신격화를 본격적으로 실시한다.
이와 같은 기장신앙촌은 천부교의 마지막 천년왕국이며, 박태선에 의해 마지막 구원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믿어지는 곳이다.19) 덕소신앙촌시대 말기부터 박태선은 ‘영모님’, ‘감람나무’, ‘동방의 의인’등으로 불렀다. 당시 신도들은 ‘감람나무’, ‘동방의 의인’ 등이 격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영모(靈母)’로 그를 추앙했다.
기장신앙촌에서는 입주자들의 일상생활이나 신앙촌 외부 신도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을 만들어 전파하였다. 그것은 ‘각종 예배에 참여한 일’과 ‘헌금’과 ‘한일물산의 물건을 파는 것’이었다. 이들의 신앙촌 생활은 공장에서의 노동과 신앙생활이 전부인데, 신앙생활의 핵심은 박태선의 설교를 듣는 것, 안찰을 받는 것, 그리고 생명물을 마시는 것과 문화 체육활동이 전부였다.20)
제3신앙촌 시대인 1972년 2월 26일 박태선의 처 박정원이 사망한다. 사망 원인은 교통사고와 음독자살 등의 추론이 있으나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이후 박태선은 중앙대학교 약학과 출신인 여신도 최옥순과 재혼한다.21) 1977년경 하나의 에피소드가 생기는데, 조성기는 ‘격암유록(格庵遺錄)’이라는 책을 가지고 와 말세 성인이 박태선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에 고무된 박태선은 이 책을 신앙촌 신도들에게 배포한다.22) 하지만 현재의 천부교는 이 격암유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1979년 박태선은 ‘승리재단’를 추진하였으며, 이 재단을 건립하기 위해서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었다. 이곳에는 무리한 헌금 강요 등이 있어서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1979년 말 전도관은 전국에 800여 개 교회의 규모가 되었다.
참고문헌
15) 앞의 책, 173.
16) 「신앙신보」 홈페이지, “덕소신앙촌” https://theweekly.co.kr/ (2019년 5월 14일 검색)
17) 『오묘원리』는 제1장 신구약총론, 제2장 창조론, 제3장 타락론, 제4장 구원론, 제5장 말세론, 제6장 재림론, 제8장 부활론, 제9장 성신론, 제10장 목자의 정의, 제11장 믿음의 행함, 제12장 절대 예정론, 제13장 기타 등으로 이루어졌다. 박영관, 『이단종파 비판(1)』 (서울: 예문사,1976), 141~158.
18) 2014년 5월 1일, 박태선 사망한 지 24년 3개월 후 천부교에서는 『하나님 말씀』이라는 허무맹랑한 천부교 1대 교주 박태선의 망언록을 발간하였다. 이 책을 발간하면서 천부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한국 땅에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며 천부교를 세우신 지 반세기,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말씀을 경전으로 출간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총7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 인간 창조의 근본, 제2부 구원의 약속, 제3부 자유 율법, 제4부 성경과 예수, 제5부 창조주 하나님, 제6부 구원과 심판, 제7부 행함의 종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천부교 홈페이지, “연혁” https://www.chunbukyo.or.kr/ (2019년 5월 14일 검색)
19) 천부교 홈페이지, “기장신앙촌 건설” https://www.chunbukyo.or.kr/ (2019년 5월 14일 검색)
20) 12여 년 동안 기장신앙촌에 입주하여 전기 기능공으로 인한 신도를 인터뷰에서 밝혀진 내용이다. 김종석, “전도관에서 천부교에로의 변화와 그 뒤 : 천부교 K교회 참여관찰을 포함하여,”(선문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9), 33.
21) 이 재혼은 신앙촌에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종교지도자가 상처하고 홀로 지내는 모습이 안좋으니 재혼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로 상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재혼하게 되었다.
22) “격암유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가장 완벽하고 정확한 예언서이며, 지금까지 완전히 해독한 사람이 없었고, 남사고(南師古) 선생(조성기를 말한) 자신도 그 내용을 다 해독하지 못했다..... 격암유록은 과거 현재 미래를 정확히 예언하였다..... 말세에 의인이 우리나라에서 출현할 것은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는 곧 성서 이사야 41장에 땅 끝 한 모퉁이에서 의인을 일으키어 인생의 타작기계로 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동일한 의인의 탄생을 예언하였고”고평가한다. 서만원, 『한민족은 인류의 조상이다: 박태선 장로님께서는 천상천하의 하나님이시다』, 75~76.
3. 천부교 시대의 시작(1980~1990)
1980년에서 1990년까지의 기간은 박태선에 의해 전도관의 막을 내리고 새로운 종교인 천부교가 시작된 시기이다. 지금까지 박태선은 ‘감람나무’, ‘동방의 의인’, ‘영모님’에서 ‘창조주 하나님’으로 신격화한다. 이 당시 박태선은 폐결핵으로 지병은 깊어지고 있었으나 자신을 신격화 한 『격암유록』으로 자신이 ‘지상의 하나님’으로 망각하게 된다.
그는 전국에서 선발된 간부급 회장단과 전도관장급 지도자가 모이는 모임에서 예수를 “왕 마귀 새끼”이며, “성경의 98%가 거짓말”이라고 선언한다.23) 이렇게 함으로써 1980년 8월 1일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에서 ‘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로 교명을 바꾸고, 교리와 정관을 변경하여 문화공보부에 신고한다.
하지만 공식적인 허가는 1992년에 받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조성기가 건넨 ‘격암유록(格庵遺錄)’이 받아들여져 박태선이 ‘하나님’으로 신격화되었으며, 이 내용에는 부인인 최옥순과 별거를 하여야 한다는 내용이 있어 최옥순을 감금하였으나, 최옥순은 신앙촌을 탈출한다.
19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천부교는 외형적으로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하는 듯하였으나, 박태선의 지병은 점점 악화되었다. 1986년 장남 박동명의 마약 사건과 아들들의 비협조로 후계자 선정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1980년 말, 박태선은 그의 설교를 통하여 천부교 신도들의 단결을 강요하였는데, 이런 결정은 박태선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의지가 없었다. 박태선이 신장이식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 이르자, 3남인 박윤명은 박태선을 미국 LA 신장전문병원에 입원시켜 수술하려고 했으나 이식할 신장을 구하지 못해 귀국한다. 하나님으로 지칭하던 박태선의 시대는 그렇게 서서히 저물어 갔다.
4. 박태선 사망과 박윤명 시대(1990년 이후)
미국에서 돌아온 박태선은 공식 집회를 거의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런 그가 1990년 2월 7일 7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천부교에서는 이 사실을 「신앙신보」를 통하여 2월 25일에서야 공식 발표하였다.24) 박태선이 사망하자 천부교 내부에서는 혼란이 일어났다.
그것은 박태선을 ‘절대자’로 믿었던 신도들 가운데 그들의 교주가 사망한다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천부교 신도들에게 박태선은 정신적 지주였고,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천부교 신도들이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컸다. 그가 있음으로 천부교 신도들은 안심했고, 그가 있음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 그를 통하지 않은 구원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박태선이 사망했다는 소식은 천부교 신도들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이런 가운데 박태선의 후계자 작업을 빠르게 진행하는데, 그가 바로 3남인 박윤명이다. 이렇게 무리 없이 후계자가 지정된 것은 아마도 박태선이 살아 있을 때 이미 정해진 수순이 아닐까 판단해본다. 박태선이 사망하자 또 다른 분쟁이 시작되는데 바로 재산분쟁이다. 이 재산분쟁은 박태선의 장남인 박동명과 차남인 박경명, 그리고 박태선의 두 번째 부인인 최옥순이 연대하여 상속권 소송을 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천부교에서 이탈한 신도들과도 연대하였다. 하지만 그 소송이 천부교와 박윤명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다. 이 재산들은 박태선의 개인 재산이라기보다 천부교 유지재단의 공적 재산이라는 논리가 더 강하게 작용했다. 이렇게 박태선의 후계자로 박윤명이 지명받았지만, 종교적인 부분과 기업적인 부분 등 이 모두를 이끌어 가는 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절대적인 신앙을 가진 신도들이 있었기에 무리 없이 천부교를 이끌 수 있었다. 아버지 사망 직후, 박윤명은 무리하게 후계자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시온그룹의 기업 회장으로써 자원하고, 종교적으로 관련된 일들은 박태선의 제자들에게 맡긴 것이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먼저 박태선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던 영적체험들(안찰, 축복일 설교, 생명물, 향취 등)을 어떻게 다시 이어 나가야 하는지와 박윤명의 리더십 부재였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박윤명은 종교적인 면에서 활동한 것이 아니라 기업의 총수로서 그의 자리를 굳혀 나간다. 이후 ‘절대자’, ‘하나님’으로 추앙받은 박태선의 천부교는 십자가를 제거하고 감람나무 잎을 물고 있는 비둘기상(像)을 심벌로 하였고, 후계자 박윤명 시대에는 종교적인 면을 유지하고자 천부교의 모든 교역자들에게 의료, 교육 등 많은 복지혜택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무의탁 양로원을 운영하여 천부교의 박윤명 시대의 위상을 높이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문헌
23) 탁명환, 『기독교 이단 연구』, 183.
24) 천부교, 「신앙신보」, (1980. 2. 2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