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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성전’이고 ‘코이노니아가 교회’인 시대
현대종교 | 채영삼 교수
2022년 09월 30일 08시 30분 입력

코로나 이후 시대를 지혜롭게 살아간다는 것은, 코로나의 재난을 통해 교회가 뼈저리게 직면하게 된 사실을 깊이 숙고하고, 그동안 내달려왔던 잘못된 길, 말씀을 떠나 걷던 길에서 끝내 돌이킨다는 것을 뜻한다. 코로나 이후에도 그 이전부터 가던 길을 계속해서 내달릴 것이라면, 교회는 쇠락의 비탈길에서 결코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그중에 하나, 코로나 기간 동안 교회가 피할 수 없이 냉혹하게 직면했던 문제가 있다. 그것은 ‘예배당’에 관련된 것이었다. 예배당에서 직접 모여 대면예배를 볼 수 없게 되자, 심각한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온라인 예배, 비대면 예배도 예배인가? 온라인으로 성찬식을 할 수 있는가? 많은 논쟁이 생겨났다. 달갑지 않아도, 직면해야 하는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사실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수 없게 된 상황은,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에서 그리 낯선 경우가 아니다. 다윗 왕국이 망했을 때 솔로몬 성전은 무너졌고, 옛 언약 백성은 포로가 되어 ‘돌로 지은 성전’ 없이 바벨론과 앗수르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야 했다. 이런 상황은 1세기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팔레스타인을 떠나 로마 변두리에 흩어져 살았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돌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들에게 성전은 무엇이며, 예배란 무엇이었던가?

포로기 이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 신약성경은 ‘성전’에 대한 새롭고도 담대한(!) 교회론을 선포한다. 이제는 돌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예수 믿는 성도들 자신이 진짜 ‘살아있는 성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리라’고 하신 그대로이다. 그분께서 먼저 자신의 부활하신 몸 자체가 ‘살아 있는 성전’이요 ‘산 돌’로서, 그를 믿는 자들이 그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신령하고 유일한 성령의 전’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배당을 지어놓고 그것을 ‘제1성전, 제2성전’으로 부른다든지, 어디 팔레스타인에 제3의 성전을 세운다든지, 혹은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굳이 ‘성전건축’이라고 부추기는 관행은, 예수님께서 헐어버리신 것을 다시 세우려는 불신앙이요, 주께서 친히 세우신 ‘살아있는 성전’인 몸 된 교회를 폄하하는 것이다.

만일 아직도 예배당을 ‘성전’이라 부르며, 목회자 자신만 ‘제사장’이고 나머지 성도는 모두 ‘그냥 백성’이라고 여기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는 주일예배 때 설교하기 전에 반드시 동물의 피를 흘리는 희생 제사도 함께 드려야 할 것이다. 그래야 아직도 구약 율법 아래에서 행하는 ‘일관된’ 신앙이 되지 않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렇듯 자기 편리한 대로 구약의 율법 아래로 돌아가는 것은 무지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새 언약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 사역을 거꾸로 되돌려서는 안 된다. 그저 작은 말의 실수이고, 다 알고 있지만 그저 그렇게 말하는 관행이라고 묻어두기에는 그 폐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코로나의 재난은 바로 이 사실을 들추어내어 온 교회의 눈앞에 또렷이 보여주었다. 그 큰 예배당에 아무도 모이지 못했을 때에, 과연 ‘하나님의 성전’은 무엇이며, ‘주의 교회’는 무엇이었던가?

그렇다고 ‘예배당 무용론(無用論)’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않다. 우리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고, 교회는 시간과 공간 속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공동체이다. 예배당을 건축하며 함께 벽돌을 나르고 계단을 닦으면서 그렇게 신앙이 함께 성장하기도 한다. 때로는 예배 장소를 빌리는 것보다, 건물을 짓는 편이 나은 경우도 있다. 예배당은 우리의 공동체적 신앙을 위해 언제나 필요하고 얼마든지 유익하다.

다만, 지어 놓은 예배당을 향해 ‘성전’이라 부르지 말고,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는 성도들을 향해 끊임없이 ‘여러분이 성전입니다. 여러분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 친히 거하시는 살아 움직이는 성전입니다’라고 말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당이 아니라 ‘성도 자신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은 단 한 차례도 건물을 향해서 ‘교회(에클레시아)’라고 부른 적이 없다. 교회란 ‘삼위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는 살아 있는 성도의 모임(코이노니아)’이다.

예배당에 모여도 참된 코이노니아가 없다면, 대면예배가 회복된다 한들 그 이전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코로나가 준 교훈 중 하나는, 참된 코이노니아가 없다면 예배당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회복은 코이노니아의 회복이다. ‘생명의 말씀이신 그 아들’과 ‘그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의 사랑’이 ‘성령의 임재와 나눔’으로 함께 하는 친교를 통해, 세상에서 ‘수단’이요 ‘물건’ 취급당하는 한 사람이,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 있는 존귀한 ‘인격’이요 ‘목적’으로 회복되는 코이노니아가 있는 곳, 거기가 교회이다.

성도는 또한 예배당의 벽을 넘는다. 성도는 세상 속에서도 ‘성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성전에 지성소가 있듯이, 세상의 온갖 혼탁한 문화의 풍랑 속에서도 그들의 심령 그 깊은 중심에는 ‘삼위 하나님만이 거하시는 지극히 거룩한 성소’가 있다. 성도는 그래서 ‘땅에 있는 하늘’과 같은 그런 존재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 구약의 성전에 ‘이방인의 뜰’이 있었듯이, 성도들도 거기서 세상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로 하여금 성전의 아름다움, 거룩하시고 생명이 충만하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소망의 이유’가 무엇인지 묻게 만드는 것이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 안에 ‘영원한 속죄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진 존귀한 하나님의 제사장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영이 친히 임재하시는 존귀하고 거룩한 성전이다. 콘크리트 건물은 결코 성전이 될 수 없다. 무엇이 ‘큰 교회’인가? 성도가 성도다운 교회가 큰 교회이다. 누가 ‘큰 목사’인가? 큰 예배당을 가진 목사가 아니라, 숫자에 상관없이 성도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키워내는 목사가 큰 목사이다.

무엇이 성전건축인가? 성도를 말씀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친히 거하시는 성전으로 세워가는 것이 진정한 성전건축이다. 예배당을 성전이라 자랑하며, 참 성전 된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만들어 놓은 우리의 폐허 한복판에서, 삼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자신의 ‘살아있는 성전을 건축’하고 계신다. 성전 된 성도 안에 거하시는 삼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온 열방과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의 충만으로 회복되는 것, 그것이 교회의 목적이다.

코로나 이후 우리는 한국교회를 새롭게 건축하시는 ‘하나님의 성전건축’에 참여해야 한다. ‘삼위 하나님과 더불어 그리고 성도 간의 인격적 코이노니아’가 살아 있는 공동체적 교회들이, 하나님을 떠나 사랑과 진리 없이 죽어가는 이 세상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사실 ‘작은’ 교회는 없다. 모든 교회가 예수님의 교회이다. 교회는 성도이므로, 성도가 있는 곳에 주님의 교회가 있을 뿐이다. 온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예수님 한 분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부사역자들일 뿐이다. 예배당의 벽으로 주의 몸 된 교회를 가르고, 주의 교회를 내 것으로 ‘사유화(私有化)’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공교회(公敎會)’성을 회복해야 한다. 성도가 성전이고, 성도가 교회이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의 성전, 부활하신 주의 살아있는 몸 된 교회만 있을 뿐이다. 코로나 이후는 ‘성도가 성전’인 시대, ‘코이노니아가 교회’인 시대이다. 이 길이, 우리가 돌이켜 가야 할 ‘오래된 새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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