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우발적인 종교범죄란 없다. 비성서적인 이단 교리를 근간으로 치밀하게 기획된 확신 범죄가 대부분이다. 이단 교리들은 성서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을 기반으로, 다른 교주들의 교리나 정체불명의 민간 속설을 ‘벤치마킹’한 후, 자신들에게 맞게 ‘업그레이드’한 형태가 대부분이며, 신도들의 비상식적이거나 비윤리적인 행태를 합리화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앞으로 여섯 차례에 걸쳐, 국내외 대표적인 이단들의 핵심 교리서를 탐구하려고 한다. 동방교 노광공의 『경화록』, 전도관 박태선의 『오묘』, 김백문의 『기독교근본원리』,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 이만희의 『천국비밀 계시록의 실상』,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몰몬교)의 『몰몬경』,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의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이단 문제의 본질과 위험성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동방교의 경전 『경화록』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신흥종교문제연구소장 탁명환씨는 … ‘살인지령 동방교 그 정체’란 제목의 강연을 통해 동방교의 비행을 폭로, 사백여 명의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탁씨는 이날 강연에서 동방교가 기독교대한개혁장로회란 이름으로 살인, 린치, 감금, 재산탈취 등을 지금까지 모두 11건이나 저질렀고 이 중에서 겨우 2가지만이 사회문제화 된 공산당보다도 무서운 단체라고 주장했다. 현재도 가출한 학생들이 1천여 명이나 되며 이들이 껌을 팔아 모은 돈이 30억 가랑이 된다고 말한 탁씨는 지난 3월 24일 뒤늦게 동방교의 사교성(邪敎性)을 파헤치는 자기에게 5백만 원의 살인지령을 내렸다고 그 경위를 설명했다.-“동방교(東方敎)는 비밀범죄집단” 「동아일보」, 1974년 4월 25일.
필사본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경화록』慶和錄은 동방교의 비밀 경전이다. 탁명환은 1960-70년대에 사회적 물의를 가장 많이 일으킨 단체로 동방교를 지목했다. 동방교는 1969년 10월 8일에 발생한 일가족 음독자살 사건의 원인 제공자로 알려지면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동방교에 심취한 아내와 네 명의 자녀가, 독약을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동방교 간부의 설교를 믿고 독약을 먹은 후, 동방교 활동을 반대하던 남편이 보는 앞에서 사망한 사건이었다. 이후 동방교의 폐해를 폭로하던 탁명환에 대해 500만 원을 걸고 청부살인까지 지시하는 등 범죄 집단의 면모를 여과 없이 노출했다.
태어나자마자, 말하고 걸었다는 교주 노광공
신도들이 필사하여 지니고 다녔던 동방교의 비밀 경전 『경화록』은 교주 노광공(盧光公, 1914-67)에 대한 신격화된 일대기를 담고 있다. 공식적인 출생 기록에 따르면, 교주 노광공은 1911년 1월 13일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면 포정리에서 출생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동방교 “설교문”(說敎文)에 따르면, 1914년 갑인년 1월 13일 평양 상수리 일번지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러 기록에 나오는 노광공의 출생연도에는 차이가 있다. 경력도 다양하다. 일제강점기에는 고등계 형사로서 친일행적이 있고, 해방 후에는 경북 안동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근무했다. 6·25전쟁 후에는 전도관 집회에서 북을 치며 박태선을 추종하다가, 1955년 대구 신천동에 동방교회를 설립했다.
노광공에 대한 신격화는 거침없다. 본관이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교하리 교하(交河) 노(盧)씨인 노광공에 대한 숭배지침이 적힌 “노가계 삼대지침”(盧家系 三大指針), “우리들은 노가계의 자손으로서 가운을 영원히 창성케 하자. 우리들은 어떠한 난관과 불만에도 노가계의 명예를 훼손시키지 말자. 우리들은 낙원에서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하나님과 교하 노씨에게 순교로서 영광만을 돌리자. 아멘 할렐루야”라는 내용을 신도들로 하여금 반복적으로 암송하게 했다.
『경화록』에 따르면, 노광공은 태어난 지 3시간 만에 “내가 세상에 조금 일찍 와서 고생하겠구나”라고 말을 했으며, 7시간 만에 “혼자 일어서서 보행”을 했다고 한다. 또한 태어났을 때 이미 치아가 있었고, 3세 때 시조(時調)와 음율(音律)을 읊었고, 6세 때에는 천자문을 20일 만에 통독 암송했고, 학교에서는 계속 1등을 놓치지 않았으며, 7세 때는 콜레라로 죽었다가 모친의 기도로 살아났다고 한다.(“설교문”) 하지만 노광공은 1967년 7월 26일 당뇨병으로 사망했으며, 경기도 부천시 소래면 대야리 71번지에 묻혔다.
노광공이 사망한 후 그의 둘째 아들인 노영구가 동방교를 이끌었는데, 탁명환은 노광공을 동방교의 교조(敎祖)로, 노영구를 교주(敎主)로 판단했다. 노영구는 1940년 1월 19일 평안북도 평원군 선안면 포정리에서 태어났으며, “하나님”과 “성신님”이라고 불렸다. 노영구는 노광공이 사망하기 전, 측근들과 부친에 반기를 들고 동방교를 탈퇴한 후, 동방교의 후신인 기독교대한개혁장로회 총회를 이끌었으나, 1970년대 이후부터 행방이 묘연하다.
탁명환에 따르면, 독일을 중심으로 동방교가 재건을 시도하며 국내 잠입을 시도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최근 동방교 잔존 세력 및 아류 단체들의 활동에 대한 제보가 간헐적으로 들어오고 있으며, 온라인상에서도 이들의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신격화된 노광공의 일대기를 담은 『경화록』
동방교의 모든 교리와 행동지침은 노광공에 대한 신격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동방교는, 예수는 일래(一來)이고, “심판주요 창조주”인 노광공은 “여호와 이래(二來)”라고 주장했다. 또한 노광공과 그의 두 아들 노영도와 노영구, 세 사람을 삼위일체로 믿었다. 노광공은 성부이고, 노영도는 성자이며, 노영구는 성신이라고 주장하면서, 노광공을 “이래 조부님”, 노영도를 “아바 조부님”, 노영구를 “아브니엘 조부님”이라고 불렀다.
동방교는 경전인 『경화록』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도들에 대한 착취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서를 악용하면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고후1:2)와 “하늘에서 내려온 자”(요3:13)가 노광공이라고 주장했다. 『경화록』은, 이스라엘을 한국으로, 예수를 노광공으로 대치한 것과 다르지 않으며, 노광공이 일으켰다는 신비한 이적들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경화록』은 필사본의 형태로 남아 있다. 「현대종교」 아카이브가 소장 중인 『경화록』 원본은 대학노트(가로 19cm, 세로 27cm) 크기에 총 96쪽 분량이다. 표지 상단에는 “慶和錄”이라는 한자 제목과 함께, 노트 소유자인 신도의 이름이 하단에 적혀 있다.
『경화록』은 장과 절로 일목요연하게 구분되어 있지는 않지만, 교주 노광공의 출생으로부터 일어난 신비한 사건들(1-25쪽), 국내 50개 지역에서 집회를 할 때 일어난 일들(25-70쪽), 24건의 치병과 이적들(70-96쪽)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먼저, 가족사로부터 시작하는 첫 부분을 보면, 노광공의 부친인 군청君淸은 안창호, 김구, 조만식, 이광수, 이승만 등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인재들을 제자로 양성했고, 평양의 오산, 숭실, 광성, 숭의 등의 기독교 학교들의 실질적인 설립자였으며, 그의 지도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이 뭉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다재다능한 불세출의 영웅으로 그려지고 있다.
또한 그의 아들로 태어난 노광공은 태어나자마자 머리카락이 검게 났고, 치아가 아래위로 3개씩 있었고, 전혀 울지도 않았고, 3시간 만에 말을 했고, 7시간 만에 걸었으며, 탯줄은 7주 후에 떨어졌다고 한다. 또한 이웃들이 출생을 축하하며, 미역과 우족 4개와 쌀을 선물했는데, 이를 곧 유황과 몰약과 황금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황당한 내용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노광공은 5세 때 일본 경찰들이 가지고 있는 애국자 명단을 빼앗기 위해 경찰서에 불을 지르고 그 명단을 탈취했고, 귀신을 쫓았으며, 학교에서는 1등을 놓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7세 때는 대동강 다리에서 뛰어내려 떠내려가면서 수영을 익힌 후에 귀가했으며, 11세부터 입산 기도를 시작했고, 15세에는 목사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탄을 쫓아냈으며,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수학할 때는 야구, 등산, 요트 등에서도 천재적 재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황족을 비롯한 많은 저명한 예술인들이 사귀려고 접근했다고 주장한다.
27세에 황해도 곡산 군수가 되어 해방을 위해 애썼고, 해방 전에는 만주, 중국, 몽골 등을 방문해 지도자를 만나 조국 광복 계획을 수립하던 중 해방을 맞았으며, 해방 후에는 이승만과 김구를 도와 정치를 했다고 한다. 6·25전쟁 때는, 이승만이 노광공에게 위기 타개를 위한 도움을 요청해서, 헌병 중령의 신분으로 일선에서 전투를 지휘했으며, 흥남에서의 선박을 이용한 철수도 자신이 지휘했다고 주장한다. 이로 인해 이승만이 선물을 들고 노광공을 방문해 눈물을 흘리며 위로했다고 적혀져 있다.
이후 미군정 고문관으로 근무했는데, 그에게 온갖 청탁을 하던 부패한 정치인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정처 없이 걷던 중, 뚝섬에서 굶어 죽은 어린아이를 우연히 발견한 후 충격을 받아, 대구에서 산기도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 그를 유혹하던 절세미녀를 단호히 뿌리치고, 표범의 공격을 맨주먹으로 물리쳤으며, 구렁이에게 3시간 12분 동안 몸이 감겨 있다가 풀려나는 등의 신비체험을 하던 중 주님을 만났다고 한다.
위에서 은은한 소리로 “우러러 보라”하는 명령이 내리고 주님이 영광 중에 나타났다. 찬란한 광채가 나며 몸에 십자가 구속의 피가 나고 흰수염(짧다)이 있는 주님이 친히 나타나서 위로하시며 백의(白衣)의 광채로 천사장(가브니엘 미가엘) 이하 천천만만(天天萬萬) 천사를 동반하시고 오셔서 위로하시고 지시를 내리고 이 땅의 6000년을 끝내고 7000년에 들어가는 7가지의 땅의 종결을 짓는 대사명을 내렸는데 침묵으로 조심성 있게 받으셨다. 그때 몸의 변화를 일으켜 털이 없어지며 어린이의 피부와 같이 되셨다.
『경화록』의 두 번째 부분은, 노광공이 전국 각지를 돌며 행한 집회에서 나타난 이적들에 관한 기록이다. 전국을 다니며 한 번에 3일 혹은 5일 정도 집회를 인도했는데, 1954년 봄 대구를 시작으로 국내 50개 지역의 집회 내용을 적고 있다. 내용 대부분은, 집회마다 수천 명이 운집했고, 온갖 질병과 장애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비를 내리고 멈추게 하는 등 노광공이 행했다는 신비한 이적과 능력에 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1954년 봄 대구 집회에 5000명이 모였는데, 집회 중에 노광공의 “얼굴이 주님으로 변화하심을 육안으로 보는 자가 많았으며 ‘주여 주여’ 하고 아우성”을 쳤으며, 1954년 가을 청도 집회에서, 노광공에게 대항하던 귀신 들린 자가 “하늘의 높으신 어른이시여 나를 몇 날만 더 있게 하소서”라고 애원했지만, 노광공이 꾸짖으며 “이마에 중지中指를 대시고 물리치니 그는 그만 시체로 화化해 넘어지고 말았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이내 사망한 그를 노광공이 다시 살렸다고 한다. 1956년 2월 초순에는 나병에 걸린 육군 대위가 신병을 비관해 자살하려고 했으나, 용문산에서 기도하던 중, “노광공 선생을 따라야 사느니라”는 글자가 환상 속에서 하늘에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노광공을 만나 병을 고쳤다고 한다.
치병과 축귀는 물론이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렸다고 『경화록』은 주장한다. 8만 명이 운집한 서울 집회에서 죽은 자를 살렸고, 1955년 1월 9-16일 부산 범일동에서 열린 집회에서도 죽은 사람을 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4일째 되는 날 여인의 시체가 들어와 장내가 소란하였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조부(祖父)님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조부님께서는 조금도 주저하시지 않고 즉시 남향하여 기도하시고 손을 대시니 곧 의식이 회복되며 피가 순환하기 시작하여 크게 영광을 돌리었다.
마지막으로 『경화록』의 세 번째 부분은 24건의 이적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1957년 7월 12일 자 기록에는 노광공이 물 위를 걸어 작은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에게 다가가는 권능을 보였으며, 폭풍이 일자 거센 물결과 바람을 잠재웠다고 한다. 각지에서 난치병, 불치병, 귀신 들린 자들을 셀 수 없이 고쳤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의 온갖 기적을 일으켰다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경화록』은 노광공 스스로도 심각한 병에 걸리기도 했지만 늘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고 말한다. 1957년 7월 12일 오전에 기록한 “일차(一次) 십자가”라는 내용에는,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후, “십자가 지시기 전 조부님과 후는 달라지셨으며 성품 모습까지 달라지시며 그 시(時)로부터 좁은길로 좁은길로 깊이 깊이 우리들을 이끌고 들어가시기 시작하셨다.
십자가 지시기 전에는 노 목사라 하셨지만 후는 이래(二來)조부님으로 변화하시여 역사하시기 시작하셨다”라는 등 노광공이 생로병사와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신적 존재임을 『경화록』 곳곳에서 보여준다.
『경화록』에 등장하는 노광공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의 생애와 이적들을 그대로 가져온 후, 예수의 자리를 노광공으로 대치한 것으로 보인다. 『경화록』은 성서의 복음서를 벤치마킹하고 업그레이드해서 그들이 구세주로 믿는 노광공의 일대기와 이적을 기록한, 동방교의 자체 제작 복음서인 것이다.
시한부 종말론을 앞세운 범죄 조직
동방교는 모임 장소를 “천국에 들어가는 대기자들이 기다리는 곳”이라고 하여 “대기처”라고도 불렸다. 노광공의 사망 직전인 1966년 당시 전국에는 13개의 대기처(가출한 신도들이 집단적으로 머무는 곳)와 14개의 교회(신도들의 정기적인 모임 장소)가 있었고, 신도 수는 1300명에 달했다.
그리고 1973년 문화공보부의 재단법인 인가 취소 직전에는 신도 수가 2500명에 이르렀다. 신도들은 대부분 어린 남녀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도들은 동방교에 입교한 후 교주로부터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이후 동방교 조직은 노출을 피해 해외로 도피하는 등 사회의 사각지대에 머물렀다.
노광공이 사망한 후, 동방교는 기독교대한개혁장로회 총회로 변신하고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청해」라는 월간지를 발간하고, 청림농림학원(靑林農林學院), 고등성경통신학교, 기독교통신대학, 성봉신학교(聖奉神學校)를 운영했다.
재단법인 밀알복음전도선교회를 운영했으나 끊임없는 반사회적 범죄 혐의로 인해 1976년 7월 13일 대법원에 의해 인가 취소가 확정되었다.
동방교의 범죄 행위가 사회와 교회의 혼란을 초래하자, 1973년 3개 기독교 연합기관장, 19개 주요 교단장, 11개 신학대학장, 13명의 교계 인사들이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고 동방교가 “교주의 여학생 신도의 간음 사건을 비롯하여 가짜 장례식, 간부 목사 김관수의 의문의 죽음, 다섯 처녀 간음 사건, 1600만 원 허위 도난신고 사건, 영등포 일가족 음독자살 사건, 「주간기독교」 사장 등 간부의 기관원 사칭 사기 사건”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고발했다.
동방교는 스스로를 기독교라고 주장했지만, 신도들은 “동방교가 사회문제가 될 때마다 갖가지 협박과 매를 맞아가며 당국에 나가 허위 증언”을 해야 했고, 동방교의 실체를 폭로했던 이들은 죽음을 당했으며, “기독교란 간판을 걸고서도 제사를 지내고 무당을 데려다 굿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통령에게 제출된 탄원서에는, 기독교대한개혁장로교의 전신은 사교 집단인 동방교이고, 1969년 10월 8일에 발생한 일가족 집단자살의 원인을 제공했고, “어린 남녀학생들과 부녀자들만을 골라서 신도로 포섭 가출시켜 소위 연단선님이라는 이름으로 껌팔이 등 행상을 시켜 금품을 갈취하고 있으며 청소년 선도에 막대한 해독을 끼치고” 또한 “신도들로부터 세상 종말이 임박했다고 허위 선전하여 최하 100만 원에서 최고 3000여만 원까지 재산을 사취하여 현재 수십억의 막대한 재산을 치부”하고 있으며, “어린 청소년 학생들로 하여금 학업을 중단케 하고 가출시켰으며, 농장에 집단 수용시켜 강제 노역을 시키고 있으며 병역을 기피시키고” 있다고 내용이 적시되어 있다.
1970년 동방교는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했으나 실패하자, 신도들의 정성이 부족해서 연기되었다고 변명했다. 동방교는 구원의 조건으로 “지성금”(至誠金)을 내세워 착취했는데, 신도들을 “성민”(聖民)이라고 부르면서, 성민이 되기 위해서 지성금을 바쳐야 한다고 강요했다. 지성금의 종류는 30여 종에 이르렀는데, 61계급의 단계를 올라갈 때마다, 그리고 각종 절기마다 온갖 종류의 지성금을 바쳐야 했다.(탁명환, 『기독교이단연구』(국제종교문제연구소, 1993), 320)
휴거와 새천지를 꿈꾸던 동방교
동방교는 동방, 즉 한국에서 재림주가 나타났으며, 그가 바로 노광공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경전 『경화록』은 노광공의 허무맹랑한 행적을 담고 있으며, 동방교는 이를 기반으로 노광공이 세상을 심판할 것이고, 세상이 불바다가 될 때 동방교 신도들만이 휴거될 것이며, 이후 새천지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전형적인 한국 기독교 이단들의 주장을 반복했다.
동방교의 소위 3대 지침은 “첫째, 희생적 정신으로 이 나라 이 민족을 구원하자. 둘째, 난관과 불만은 인내로서 이기자. 셋째, 사랑과 자비로서 전심을 일으키자”였지만, 이와는 무관하게 “기독교와는 하등의 관계없이 기독교의 탈을 쓴 사교집단”(“탄원서”)이었다.
탁명환은, “철저히 지능적인 사기꾼이던 노광공에 의해 가산을 탕진 당하고 가정이 파괴되고 학업을 중단당하고 정조를 유린당한 수많은 피해자는 한 맺힌 원한을 풀지 못하고 응어리를 품은 채 살아가고 있다”라고 안타까워하면서, “1950년대 교조 노광공의 부산 여학생 간음 사건을 비롯하여 1960년대에 접어들어 간음, 린치, 폭력, 살인 등 갖가지 사건으로 사회를 떠들썩케 했던 동방교는 1967년 7월 13일 그 재단법인이 대법원으로부터 취소 확정판결을 받기까지 실로 가공할 사교로서의 범죄행각”을 벌였다고 평가하고(『기독교이단연구』, 297, 325), “동방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또 기독교대한개혁장로회로 변신한 동방교는 기독교 간판으로 위장한 사이비 종교집단”이라고 결론짓는다.(탁명환, 『한국의 신흥종교』 제2권, (국제종교문제연구소, 1980), 41, 62)
오늘날 신천지가 있다면, 반세기 전에는 동방교가 있었다. 대표적인 반기독교 이단 단체 중 하나로 알려진 동방교는 사회적 논란과 함께 지하로 잠적한 듯했지만, 해외로 도주하거나 국내에 숨어있던 잔존 세력들이 최근 온·오프라인 상에서 스멀스멀 조직을 재건해 운영하면서 재기를 노리고 있다.
다음 호에서는, 신천지의 뿌리이자 통일교와 함께 한국 이단의 양대 산맥으로 알려진 전도관(박태선)의 경전 『오묘』에 대해 탐구하고자 한다.
▲탁지일 교수 본지 이사장 겸 편집장 부산장신대학교 교회사 |
* 이 글은 「기독교사상」 2023년 4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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