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를 생각하다 보면, 가끔씩 예수님께서 데가볼리 지역에 가셔서 무덤가에 살던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친 사건이 떠오르곤 한다. 공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그 귀신은 ‘군대(軍隊, logion) 귀신’이었다. 아마도 당시 그 지역이 로마 제국의 군사들이 주둔했던 지역이었고, 그 마을에 유대인들이 아니라 로마인들이 주로 먹었던 돼지고기를 공급하는 양돈업이 성행했던 것도 그런 이유라고 짐작된다.
마을의 무덤가에 있었던 그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은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을까? 내막을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어쩌면 로마 군인들의 잔혹한 살육이나 강간이나 약탈로 인해 가족을 잃었거나 그런 이유로 큰 충격을 받고 실성한 주민들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는 왜 무덤가에서 살고 있었던 것일까? 혹시 로마 군인들에게 희생당했던 그의 가족 중 누군가가 거기에 묻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를 무덤가로 쫓아내 거기에 격리시켰기 때문이었을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 지역에 가셔서 무엇보다 그 ‘군대 귀신들’에게 시달리며 마을로부터 버려진 사람, 거의 사람의 형체를 잃어버린 그에게로 가셨고, 그를 고쳐주셨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이 또 있다. 그것은 그 마을 사람들이 군대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신 예수님을 환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마을에서 떠나가라고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혹시 그 쫓겨난 군대 귀신이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 몰살당한 일로 그들이 로마 군인들을 대상으로 성업 중이었던 돼지 치는 일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우리 사회의 온갖 혼란, 남과 북, 좌와 우, 세대와 세대 사이의 극한 대립이 날로 심화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꾸 이 군대 귀신 들린 자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전쟁의 참혹한 기억에 시달리는 듯한 상태에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전쟁의 포탄은 실로 땅에만 떨어지지 않는다. 한 가족이 단란하게 모인 밥상 위에도 떨어지고, 그렇게 자녀와 사랑하는 남편, 아내, 부모를 잃은 한 사람의 가슴 한복판에 떨어져, 거기에 평생을 메울 수 없는 구덩이를 남긴다. 그 깊고 처참한 구덩이 속에 고이는 슬픔과 비통과 공포는, 결국 그의 모든 감정과 이성과 의지를 마비시킬 만큼 강력한 트라우마를 남기는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고 남북이 갈린 지 70년을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곳곳에서 ‘군대 귀신’의 환영(幻影)과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자신의 눈앞에서 사랑하는 가족이나 전우가 죽어갔던 그 전쟁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분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들에게 공산주의는 이념이 아니라 ‘혈육의 죽음’이다. 그것은 여전히 치유 받아야 할, 말할 수 없는 아픔이고, 살아 있는 공포이며, 헤어 나올 수 없는 트라우마이다. 종종, 우리 사회에서 이런 분들은 ‘시대에 뒤처진 돈키호테’처럼 취급되곤 한다. 하지만 이들은 한 때 이 나라가 선택한 신앙의 자유, 생존의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분들이다. 우리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교회는 이들을 품고 또 치유해야 한다.
문제는, 아직도 꿈에서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戰場)을 뛰는 악몽을 꾸는 이런 분들이 아니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어쩌면, 군대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셨던 예수님에게 도리어 그 지역을 떠나달라고 요청했던 그 ‘양돈 업자들’과 같은 부류들일지 모른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남과 북이 갈려 대치하고 있다. 참으로 비극이다. 그런데 이토록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진짜 문제는, 이런 상황을 어떤 식으로든 악용하여 자신의 이득을 보려는 ‘종교, 정치, 경제, 사회적 장사치’들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종종, 한국 사회가 ‘집단극화’(group polarization)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지목한다. 한 사람의 견해가 좌든 우든 한 집단 안으로 들어가면 극단적으로 강화되어, 상대방을 악마화하기까지 멈추지 않는 극단으로 흘러가기 쉬운 사회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은 왜일까? 사회심리학이 다루는 주제 중에 ‘공포관리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이라는 것이 있는데, 사람들이 죽음이나 재난의 공포에 직면하면 자신이 속한 집단과 적대적인 ‘외(外)집단’ 사이의 양극화를 만들어 내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생각이나 판단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 ‘내(內)집단 편향성’이 강화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이렇게 ‘집단극화’(集團極化) 현상이 강한 것은, 우리가 쉽게 자각하지는 못하지만 혹시 우리 공동체의 마음 저변에 ‘전쟁’뿐 아니라 ‘인재(人災)에 가까운 잇따른 재난’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와 불안’이 여전히 작동하고, 그것이 일상적인 패턴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이유로 서로 ‘나뉘기’ 시작하면 마치 서로를 죽일 듯이 적대시하고, 내 편은 무슨 불법을 저질러도 이성을 잃고 두둔하곤 하는 것이 아닐까? 아직 남과 북이 갈려 있는 이런 현실에서 전쟁의 기억과 실존하는 위협 자체를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교회가 해야 할 치유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교회가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하다.
그것은 ‘작은 자 한 사람을 살려내려는 긍휼의 마음’이다. 이것이 군대 귀신 들린 자에게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태도이고, 교회가 따라가야 할 길이다. 안타깝지만, 이 땅에서 전쟁의 아픔과 실존하는 위험이 사라지는 것은 여전히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다만 교회는, 이런 상황을 ‘악용’(惡用)해서 자신의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의 태도를 분별하고, 그들을 바로 인도할 책임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집단극화’가 일상인 우리 사회에서, 교회는 갈기갈기 찢긴 이 사회를 더욱 나누고 찢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소통하고 손잡게 해주며, 이들이 참으로 죽음과 공포와 적대심에서 나올 수 있도록, 생명과 화평을 복음으로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생명’의 복음을 전하며, 이런 ‘화평’을 살아낼 수 있을까?
적어도 교회는, 스스로 ‘이념의 광기(狂氣)’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회는 어떤 쪽이든 ‘이념’이라는 깃발을 휘두르며 ‘집단극화’를 조장하고,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일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 어떤 경우에도 ‘이념 때문에 사람을 짓밟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군대 귀신 들려 파괴되고 망가진 사람들을 치유하셨다. 남에서든 북에서든, 이념 때문이든 돈 때문이든, 하나님 아닌 것을 우상으로 삼으며, 사람을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으로 보지 않고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섬기지 않는 권력’은 모두 반(反)성경적이고,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가신 길을 따라, 생명의 복음으로, 화평의 복음으로, 이 갈기갈기 찢긴 민족과 사회를 ‘하나로’ 품어야 한다. 그것이 긍휼의 주님이신 그분을 따라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살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며 나아가는 길일 것이다.
- Copyrights ⓒ 월간 「현대종교」 허락없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