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이라는 숫자를 쓰자마자 ‘아재스럽다’는 핀잔이 날아들 것 같지만, 개인사가 곧 한국교회의 현대음악사와 상통하는 부분이 많아 기억의 일부를 나눠보려 한다.
▲민호기 목사 찬미워십 대표 소망의 바다 대신대학교 교회음악교수 |
그해 대학교 1학년이 된 나는 ‘찬미 선교단(지금의 찬미워십)’에 입단해 찬양 사역자의 꿈을 구체적으로 키워가기 시작했다. 선배의 소개로 외국 CCM 음반을 판매도 하고 뮤직비디오를 상영하며 토론도 하는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본 영상은 예배 시간에 찬송가 외엔 다른 노래를 부를 수도 없고, 통기타도 못 치게 하던 보수 교회에서 자란 나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찬양집회 현장인지 록가수의 공연장인지 헷갈릴 정도로 영상 속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넘실대고 있었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가수는 알고 보니 목사님이었다.(묘사하다 보니 지금의 내 자신 같기도 하다^^)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건지, 가수에게 열광하는 건지 도무지 구분이 안 가는 관객들을 차마 예배자라 부를 수가 없었다. 이건 말하자면 문화충격, 그 이상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건 그 불경한 광경이 너무 좋은 거다. 억압적 환경에서 입시지옥을 막 통과해 낸 청춘에겐 기성세대에 반하고 기존의 가치를 전복하는 것이라면 그게 뭔들 매력적이지 않았을까마는, 거기에는 그 이상의 특별한 것이 깃들어 있었다.
‘오늘의 음악, 그러나 메시지는 영원한 것’
초창기 CCMER들의 표어처럼, 처음엔 CCM의 화려한 외피에 마음과 시선을 빼앗겼는데, 들여다볼수록 그 깊은 곳에는 거대하고 강력한 메시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CCM 가수 Michael W. Smith의 라이브 콘서트 실황에서 볼 때는 그냥 하드한 록 스타일의 곡이라고만 생각했던 을 후에 뮤직비디오로 보니 이건 숫제 예수님의 생애를 통째로 녹여낸 작품이었다.
지면의 한계로 음악과 영상을 전달할 수 없으니 가사라도 소개해 본다.
by Michael W. Smith
Young man, up on the hillside
Teaching new ways
한 젊은이가 언덕 위에 서서 새로운 길을 가르칩니다.
Each word, winning them over
Each heart a kindled flame
어떤 말은 승리를, 어떤 가슴은 불꽃처럼 타오릅니다.
Old men, watch from the outside
Guarding their prey
나이 많은 이(권력자)는 그들의 양떼를 지킵니다.
Threated by the voice of a paragon
Leading their lambs away
Leading them far away
틀에 박힌 목소리로 그들의 양떼를 멀리 몰아갑니다.
Nobody knew his secret ambition
Nobody knew his claim to fame
누구도 그의 숨겨진 야망을 몰랐습니다.
누구도 그가 원한 명예를 몰랐습니다.
He broke the old rules steeped in tradition
He tore the holy veil away
그는 전통적인 오래된 법을 깨뜨리고
거룩한 휘장을 찢었습니다
Questioning those in powerful positions
Running to those who called his name
권세있는 자들을 꾸짖되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달려갔습니다.
But nobody knew his secret ambition
Was to give his life away
누구도 그의 숨겨진 꿈을 몰랐습니다.
그것은 그의 생명을 바치는 것임을.
뮤직비디오가 끝날 때쯤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록 음악 때문에 울 수도 있구나 하는 걸 처음 깨닫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Stryper, Petra, D.C Talk, Carmen 등 당시의 팝이나 가요보다도 더 파격적인 음악을 구사하지만, 강렬한 가사와 기발한 상상력의 메시지를 가진 CCM 곡을 만났고, 이런 노래들은 음악의 장르를 넘어 말씀 묵상의 한계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한편, 화려한 노래들을 듣다가 Michael Card의 잔잔하지만 깊은 묵상을 만났을 때의 무게감과 안도감 또한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을 주었다.
by Michael Card
How could it be this baby in my arms
Sleeping now, so peacefully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내 품 안에 평화로이 잠든 이 아기가.
The Son of God, the angel said
How could it be
어떻게 천사가 말한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나요
Lord I know He's not my own
Not of my flesh, not of my bone
주님 저는 압니다.
이 아이가 나의 것이 아님을
나의 살도 나의 뼈도 아님을
Still Father let this baby be
The son of my love
그러나 아버지 이 아기가 저의 사랑스런 아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Father show me where I fit into this plan of yours
아버지 저에게 당신의 계획을 보여주십시오
How can a man be father to the Son of God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의 아버지가 될 수 있겠습니까
Lord for all my life I've been a simple carpenter
주님 저는 일평생 평범한 목수에 불과합니다.
How can I raise a king, How can I raise a king
어떻게, 어떻게 제가 왕을 기르겠습니까
He looks so small, His face and hands so fair
그 분은 너무 작습니다.
얼굴과 손은 너무도 사랑스럽습니다.
And when He cries the sun just seems to disappear
그가 울 때면 태양이 사라지는 듯하고
But when He laughs it shines again
How could it be
그가 웃을 때면 그 빛이 다시 비춰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이런 노래들은 결국 음악보다 이야기 그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 노래의 정의는 ‘어떤 사람의 사상이나 감정을 음악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필자가 애초에 CCM을 ‘Contemporary Chrisian Music’이 아니라 ‘Contemporary Christian Message’로 정의 내리게 된 데는 이 시절에 만난 노래들의 영향이 지대하다.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건한 분위기의 Hosanna Integrity의 예배실황은 전혀 다른 면에서 충격을 주었다. 한국교회였다면 저렇게 드럼치고 기타치면 난리가 났을 목사님, 장로님 연배의 어르신들이 찬양을 부르며 박수치고 손들고 눈물 흘리는 모습이었다. 솔직히 찢어진 청바지 입은 머리 긴 CCM 가수의 무대에 열광하는 모습보다 이게 더 충격적이었다. 기성세대도 저렇게 찬양할 수 있구나 하는 부러움과 동시에 가능성의 발견이랄까.
이건 단순히 사회의 진보성을 반영하는 것인지,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인지를 쉽사리 판단할 수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본질적 진리와, 상황에 따라 변모할 수 있는 형식의 경계를 명확하게 성경적으로 규정할 수도 없었다. 예를 들면, 여성안수 문제라던가, 음주, 흡연과 같은 시의성이 반영될 수밖에 없거나 해석의 여지가 분분한 문제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시편에서 얘기하는 악기 ‘수금’이 현재의 ‘기타’로 치환이 가능한지, 성경에서 추라는 춤은 어깨춤 정도는 가능하지만 팝핀이나 브레이크댄스는 포함되지 않는 건지, 손을 드는 건 눈을 지그시 감고 경건하게 들어 올리는 건 되지만 힙합의 풋쳐핸즈업은 안 되는 건지, 누구도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어떤 어른들은 현대적인 음악의 가치를 지지해 주었고, 어떤 어른들은 마귀의 앞잡이라고 정죄했다.
같은 성경을 두고도 어떤 이는 노예제도를 지지하고 어떤 이는 반대했던 것처럼 성경 해석 의 모호함은 논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렇게 뜨겁게 타올랐던 교회 내의 악기사용과 음악장르 논쟁은 20년 전 이야기가 아니라 최근 ‘EDM’논쟁과 모 목사의 글로부터 촉발된 ‘드럼 논쟁’까지 이어졌다. 드럼으로 예배를 섬기는 이들의 격렬한 항의에 글을 쓴 목사의 사과로 이 일은 해프닝으로 지나가는 듯 보였지만, 여전히 음악의 속성상 호불호가 나눠질 수밖에 없고 자신이 선호하는 장르가 아니면 배격하기 쉬운 한계가 있다. 이는 클래식이냐 팝이냐를 선택하는 것으로 해결될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 뉴에이지 음악처럼 듣기에 편안하고 조용한 음악의 위험성도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다음 호에서는 이런 장르 논쟁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음악의 ‘가치중립성’은 어디까지 인정되어야 하는지를 논의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