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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상규 교수
서울 총신대학교 외래교수
코스타 강사
변상규 대상관계연구소 소장 |
교주들은 정상적 정신(menta)l의 소유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내면에는 자기애적 인격장애에 해당하는 성격 유형이 자리 잡고 있다. 그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굉장한 환상(Vision으로 둔갑된)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다. 이들은 항상 무한한 성공(이런 형태가 지속되면 무한한 영생을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영리함, 자기의 재능이나 외모에 대한 욕심과 야망과 환상이 있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나가면 종교적 형태까지 띠게 된다. 심리학 용어 중에 “전능환상”이라는 말이 있다. 유아기의 아기들에게 존재하는 독특한 환상인데 일반적으로 생후 6개월 이전에 아기들이 갖는 정상적 착각상태를 의미한다.
아기들이 출생하면 즉시 엄마를 알아보는 게 아니다. 몸은 탯줄이 잘려지면서 엄마와 분리되었으나 아직 아기는 심리적 분화(differentiation)를 한 상태가 아니다. 그래서 배가 고파 울적에 엄마가 젖이나 우유를 물리면 만족스럽게 먹은 후 살짝 미소를 짓는 경우가 있는데 엄마는 이를 보고 아기 이름을 부르며 “아이고 우리 아가가 젖 잘 먹으니 기분이 좋아 웃는구나”라고 반응한다. 그런데 사실 아기들이 미소를 짓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즉 아기는 자신이 원하는 젖을 만족스럽게 먹은 후 이렇게 느낀다. “아 내가 젖을 창조했어!”
이 시기(6개월 이전)는 엄마란 객체와 아기(나)라는 주체를 선명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시기다. 엄마가 나 같고 내가 엄마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작용하는 시기이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이렇다. 생후 2~3개월 정도의 아기가 아침에 일어나 옹알이를 하며 천정을 본다. 그리고 눈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본다. 그럼 무엇이 돌아간다고 생각하겠는가? 엄마가 이 모습을 보면 아기가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눈을 이리저리 돌린다 생각하겠지만 아기 입장에서는 천정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천동설이요 천상천하유아(乳兒)독존의 심리이다.
이런 전능환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아기의 뇌가 발달하면서 생후 6개월 이후가 되면 아기는 어른들이 느끼는 수준으로 서서히 현실을 지각하게 된다. “아, 누군가 젖을 주는 것이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구나.” “아, 내 눈이 돌아가는 것이구나.” 선명하지는 않아도 서서히 아기의 전능환상은 그렇게 깨어지게 된다.
그러나 전능환상을 경험한 아이들은 환상의 맛을 보았기에 그러한 환상은 훗날 상상력의 자원이 되고 창조성의 근원이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 말이다. 하지만 병리적인 사람들의 어린 시절을 보면 정상적 발달과정에서 존재해야 할 전능환상이 부재한 채 성장했다. 전능환상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돌보는 대상(care giver)이 자기대상(내 마음 같은 대상을 말한다)처럼 반응해 주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전능환상을 누려보지도 못한 채 성장하게 되면 환상(fantasy)은 환멸(disillusionment)로 전락한다. 이러한 환멸은 아기의 마음 안에 그야말로 거짓된 환상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것을 과대망상(delusion of grandeur)이라 부른다.
이러한 과대망상 속에는 자신에 대한 균형 잡히지 않은 이미지가 침투해 들어오기 때문에 한계를 정하는 것에 대한 선이 없다. 물론 그런 선이 너무 없으면 현실인식에 실패한 정신분열증으로 가게 되지만, 그런 선이 있음에도 현실을 왜곡하고 자신의 망상을 현실처럼 믿게 된다면, 그리고 그런 믿음이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자신만의 신념이 된다면 당연히 성장하면서 자신만의 극단적인 아집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인격 장애자는 그렇게 태어난다.
그런 관점을 갖고 교주들을 보라. 자기만이 카리스마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보스들을 보라. 사실 교주들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분명 정통 기독교 교회 간판을 걸고 있는 어느 개척 교회의 목사는 지하실 교회에서 매번 몇 명 되지도 않은 노인들을 모시고 집회를 했는데 항상 주제는 “세계 선교”였다. 내가 보기에는 그 사람이 있는 동네만이라도 복음화를 시켰으면 했는데 그는 동네 선교나 전도는 무관심했고 어떻게든 해외 선교, 세계 선교를 해야 한다고 교인들을 다그쳤다.
물론 불가능해 보여도 큰 꿈을 갖는 것은 좋다. 그러나, 언제나 과도함이 문제다. 대형교회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돈을 너무 많이 들여 교회당 짓고 부도나는 교회, 피눈물 나는 헌금 모아 만든 예배당을 경매에 내어 놓는 교회, 결국 돈 많이 준다는 이단에게 건물을 넘기는 교회, 빚을 많이 지면서도 너무 크게 교회를 지어서 이게 교회인가 싶을 정도로 욕을 먹는 교회. 사실 이들이 그런 건물을 지을 적에는 누구나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그런 목회자들은 스스로에게 속은 것을 모르고 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은 의식만 갖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이라는 것을 갖고 살아가는데 의식과 무의식은 서로 문법이 다르다. 달라도 그냥 다른 게 아니라 상이하게 다르다. 저들의 의식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으나 저들의 무의식까지 하나님의 영광이었을까? 원님 덕에 나팔 분다는 속담처럼 큰 교회 지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운운하지만 그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는 교회 담임목사인 것이다. 그러니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기가 영광을 받고 누리는 것이다.
의식은 항상 아니라 말한다. 그러나 무의식도 그렇게 말할까?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이전에 등장한 인물 세례(침례)요한이 말한 고백을 진심으로 가슴 깊이 새겨야 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그러나 우리는 “그도 흥하고 나도 흥하여야 한다”는 논리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 시대는 은밀한 자기 숭배가 판을 친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크리스토퍼 라쉬가 말한 대로 이제 우리나라 역시 나르시시즘의 문화가 종교에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목회자들은 언제부터인가 교인들 눈치와 기분을 살피며 목회를 한다. 교인이 줄면 헌금이 줄고 헌금이 줄면 교회가 쇠해질 테니 말이다. 조금 삐딱하게 보자면 하나님도 하나님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교인들 기분이 하나님이다.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기 위해 할 말도 가려서 한다. 때로는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좋다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말을 못한다. 그러니까 제사장으로서의 목회자 역할은 잘 감당하는데, 예언자적인 직면이나 통찰은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자기도 모르게 우리 사회에서 변화를 거부하는 기득권 세력으로 전락하고 만다.
나는 자기심리학자 코헛의 말대로 자기(self)가 건강해야 함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건강해지면 그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중심적(ego-centrism) 삶을 포기하며 하나님 중심적, 타자 중심적인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20세기 천재 신학자 본 훼퍼가 역설한 교회론이기도 했다. 그렇게 살려면 우선은 자아가 건강해야 한다.
건강한 자아만이 자기 포기가 가능하다. 건강한 자아를 경험해 본 적도 없는 교인들에게 워치만 니 식으로 “자아를 죽여야 한다”, “자아를 파쇄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신앙적 가학일 수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모든 교인들이 다 워치만 니 식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내가 보기에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인들은 아예 죽을 자아조차 없다. 하도 죽고 살아서 말이다. 좀 살려주고 죽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착한병에 걸린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순종만 할 줄 알지 능동적, 창조적으로 무언가에 도전할 줄을 모른다. 그래서 순종은 잘하는데 용기가 없다.
한국교회가 저질 이단, 사이비, 신흥종교에 놀아나는 이유 역시 그간 교회가 보여 온 폐쇄성, 지나치게 순종과 아멘만 강요하는 수직적 구조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병리적인 교주나 보스들은 희망을 제시하는 듯 하지만 실은 자기만의 은밀한 욕심을 정당화하는 비전을 제시한다.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 회장이었던 사람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도 냈지만 기업이 문을 닫고 말았다. 세계가 넓은 건 분명한데 할 일을 너무 많이 벌여놓은 결과라고 한다. 일을 벌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관리하고 가꾸고 내적인 근육을 키우는 일을 하지 않은 결과였다. 나는 이것 역시 희망적 환상을 제시하는 듯 하였지만 자신만의 과대자기를 투사한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 시간을 발표하기 위해 열 시간을 준비하며 희망을 말하는 사람과 한 시간을 발표하면서 영양가 없는 말을 떠드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과대자기를 가진 교주나 보스들은 자기 꿈에 들 떠 있지만 제대로 된 리더는 그 꿈을 위해 수많은 고뇌의 시간과 실사를 거친다. 그런데 망상을 제시하면 기업은 망하는데 희한하게 종교는 흥한다. 그래서 사이비들이 더 판을 친다. 망상에 목말라하는 수많은 심리적으로 굶주린 추종자들이 거짓 희망을 전하는 잘못된 보스나 교주들에게 박수치고 옳다 떠들고 받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끼리 집단 결속력을 만들고 스스로의 아집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사이비든 신흥종교든 공산주의든 이데올로기이든 백 년을 가는 법이 없다. 결국 시간이 진실을 보여준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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