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요한 교수] 종말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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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종교 | 현요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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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9 08:37 입력
기독교는 종말론적 신앙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을 부정하고 세상의 종말을 꿈꾸며,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저세상만을 바라보는 신앙은 아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내세의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동시에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소망하는 신앙이기에(마6:10) 더욱 이 세상을 소중히 여기고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신앙이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가 나온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온갖 죄악을 저지르며 하나님의 백성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들을 책망하고 권면하며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고, 선지자들이 경고한 대로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되었고, 남왕국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되었다.
그런데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다시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회복과 재건에 대한 말씀들을 주셨다. 그러한 예언의말씀들에는 메시아의 도래, 성령의 강림, 하나님 나라와 종말의 도래와 같은 주제들이 함께 얽혀 나타난다. 이사야 61장 1-3절은 메시아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포로로 잡혀간 하나님의 백성을 해방하고 치유하고 회복시킬 것임을 예언한다.
예언자들은 종말에 일반 백성들에게도 성령이 임할 것인데 이러한 성령의 강림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에 복종케 하고, 새로운 마음과 새 영을 줌으로써(겔36:26이하)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을 재창조할 것이라고 한다(사44:3).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이 마른 뼈와 같은 그의 백성을 다시 살려 일으키신다고 한다.
그는 그의 영을 그들에게 줄 것이요(겔37:14) 그들은 그 본토와 본국으로 모여와 한 왕 아래서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겔37:21-23)” 한다. 요엘 역시 하나님이 그 영을 남녀노소 차별 없이 만민에게 부어주실 것이라고 한다(욜2:28).” 다니엘은 세계를 지배하는 흉포한 제국의 세력들을 사자, 곰, 표범, 열 뿔 달린 짐승 등으로 묘사하면서, 한동안 비록 이스라엘이 그러한 세력들 때문에 고생하겠지만, 종말에는 그들이 심판을 당하고 망할 것이요, ‘인자같은 이’가 강림하여 모든 백성과 나라들을 복종시키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것임을 보여준다(단7:1-28).
그런데 신약성경에 와서는 그리스도(메시아) 예수님의 오심과 성령의 강림을 통해서 그러한 종말론적 희망이 성취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전파한 복음의 핵심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이었다. 종말에 오리라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가까이에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예수님에 의하여 도래한 것이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하신다. 심지어 누가복음 17장 21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사도행전 2장 17절 이하의 본문은 오순절에 성령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임하였는데, 그것은 말세에 대한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복음서들은 동시에 하나님 나라가 임박한 장래에 임할 것이라는 상반된 내용도 보여준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충격적인 예언을 듣고, 제자들은 그때와 징조에 관하여 예수께 묻는다(마24:3).
예수님은 징조들을 말씀하시며 그런 징조들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올 것이며, 새 세대가 오리라고 하신다(눅21:31; 막13:30; 마24:34). 이처럼 복음서에는 하나님 나라와 종말이 이미 임하였다는 내용과 장차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상반된 내용이 함께 나타난다. 복음서는 이 양면성을 억지로 조화시키려 하지 않고 그대로 제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성령의 강림을 통해 하나님 나라와 종말은 이미 왔는데(현재성), 그 하나님 나라와 종말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일이기 때문이다(미래성). 사도 바울도 역시 종말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함께 말해준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이 악한 시대에서 구하셨다고 한다(갈1:4).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이미 옛 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새 시대를 개시하셨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었고, “새 것”이 되었다(고후5:17). 동시에 바울은 분명한 어조로 아직도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적인 부활을 미래의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고전15:51-54; 살전4:13-18).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새 것’이 도래하였다. 그러나 ‘옛것’이 아직 소멸되지 않고 있다. 이 두 가지의 긴장 관계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바울은 종말이 “이미 도래하였음”과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의 대립을 “첫 열매”와 “보증”이라는 말로 잘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은 종말에 있을 보편적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고전15:20). 현대적 용어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의 선취인 셈이다. 종말이 앞당겨 성취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첫 열매’라는 개념에 주목해 보자. 그것은 새로운 추수의 시작이요 새것의 도래이지만, 아직 모든 열매가 거두어진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또한 주목 해 볼 것은 ‘보증(아라본)’이라는 개념이다. 우리에게 오셔서 거하시는 성령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약속의 ‘보증’이요(고후1:22), 하늘의 영원한 처소와 부활에 대한 ‘보증’이라고도 한다(고후1:1-5).1)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성령으로 영원한 부활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사람으로 ‘인쳐진’ 것이다(고후1:22, 엡1:13).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이단들처럼 자신들에게 와야 마지막에 구원을 얻을 ‘인치심’을 받는다고 하는 말에 속지 말자.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자들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초림과 성령의 강림으로 우리는 지금 여기서 종말, 하나님 나라, 영생, 부활 생명을 앞당겨서 미리 맛보며 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종말과 하나님 나라는 아직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우리는 아직도 여러 가지 고난과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종말과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으로 보증되어 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함께 보는 것이 건전한 종말론이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이 긴장 관계를 무시하고 현재성만 주장하거나, 미래성만 주장하는 것은 올바른 종말론이 아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보면, 자신들은 종말과 예수 재림의 때를 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집단에 와야 재림 예수와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고 미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소위 시한부종말론자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92년 10월 28일에 예수님의 공중 재림과 휴거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많은 사람들을 미혹했던 다미선교회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거짓이었음은 그날이 되자 분명히 밝혀지고 말았고, 그들을 따르며 재산을 다 가져다 바치고 학업과 직장 등 일상의 삶을 다 포기했던 많은 사람들은 큰 피해를 보았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분명 말씀하셨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그 날과 그 때를 안다고 주장하는 모든 이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부정하는 자들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 의하면,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는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데 이때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렇게 오시는 “예수를 볼 것”이라고 하였으며(마24:30), “번개가 동쪽에서 나서 서쪽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초림처럼 어린 아기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특정 집단 안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지지 않고, 온 천하만민이 다 알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단의 아무개 교주가 재림 예수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 거짓일 수밖에 없다. 요즈음 어떤 사람들은 코로나19 백신 속에 초소형 베리칩이 들어 있는데, 이것이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짐승의 표이므로, 백신을 맞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백신은 베리칩이 아니다. 계시록에서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은 그 짐승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와 관련되어 있는데, 오늘날 백신을 맞는 것이 무슨 우상숭배와 관련된 일인가? 그것은 우리의 신앙고백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전염병을 막는 의학적 방책일 뿐이다. 그런 이야기는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를 자극하는 근거 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 상징은 그 상징을 제시하는 본문의 상징체계 안에서 풀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7장 4절에 나오는 144,000명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것이 구원받을 자들의 제한된 숫자이며 자기들 집단에 와서 그들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다 해내야 그 수에 들어갈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계시록 7장의 144,000은 회복된 이스라엘 12지파에서 나온 구원받는 사람들의 숫자이다.
이어지는 7장 9절에는 세계 만국에서 나와서 어린양을 찬양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만국 백성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은 단지 144,000명에 제한되지 않는다. 144,000이라는 숫자도 상징이다.
12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데, 144는 12×12이니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함을 강조한 것이요 1000은 많은 수를 의미하므로, 144×1000이란 하나님의 백성의 충만하고도 완전한 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숫자는 구원받는 백성의 제한을 의미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수의 충만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어떤 행위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한 것이므로(엡2:8-9), 구원받는 숫자에 들기 위해서 그들의 집단에 헌금을 많이 바친다든지, 교인 수를 증가시키는 공로 등을 채워야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종말론은 기독교적 희망에 관한 교리이다. 그 목적은 사람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요한계시록이나 다니엘서와 같은 묵시문학에는 무서운 심판의 내용들이 나온다. 그것은 그 당시 심한 박해를 당하던 하나님의 백성에게 불의한 박해자들이 결국은 다 망하고, 박해받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할 것임을 보여주려고 기록된 것이다.
박해자들이 지금은 아무리 강하고 커 보여도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망하게 될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주는 메시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에 대한 기대와 소망 속에서 참된 신앙으로 환난과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하겠다.
각주
1) 어떤 학자들은 ‘아라본’이라는 말이 당시 매매 계약에서 물건의 대금 일부를 미리 주는 보증금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면서, 성령이 그런 의미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 저작권자 (C) 월간 현대종교(hdjongkyo.co.kr), 영리 목적의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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