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요한 교수] 부활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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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종교 | 현요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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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6 08:48 입력
기독교 신앙은 몸의 부활을 믿는 신앙이다. 기독교는 단순히 죽어서 영혼이 천당에 가는 것으로 끝나는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의 궁극적인 소망은 몸의 부활이다. 이것은 사도신경에도 명시되어 있다. 우리는 간혹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간증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요즈음에는 의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그런 사람들의 수가 많이 늘어났다. 가령 어떤 사람이 병들어 심장도 멈추고 호흡도 끊어졌는데, 심폐소생술을 통해서 살려내는 일이 있다. 그런 이들 중에 사후 세계와 어떤 신적 존재를 보고 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런 것을 부활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아난 사람들은 결국 수명이 다하면 죽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현재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중간기’를 살아가고 있으며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 부활을 목격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고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다. 그들의 시신이 땅에 묻히거나 화장을 거쳐 산에 뿌려지거나 결국은 다 분해되어 없어졌고 지금도 없어지는 중이다. 그들의 영혼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신약성경은 악인은 음부에 간다고 하고(눅16:22-23; 계 20:13), 대조적으로 구원받은 영혼들은 낙원에(눅23:43), 혹은 아버지의 집에(요14:2-3) 가는 것으로 말하기도 하고, 더 나은 본향이나 하늘에 있는 성에 가는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히11:16). 그러나 성경의 종말론적 비전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이 세상이 종말을 고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요(요6:39; 계20:4), 그들은 새로운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 살게 될 것이다(계21:1-5). 반대로 악인들은 최후의 심판을 거쳐 불못에 던져진다고 한다(계20:14-15). 성서적 신앙은 단순히 영혼불멸을 믿는 것도 아니고, 죽은 후에 영혼이 우주적인 혼에 흡수되어 사라진다고 믿는 것도 아니다.
몸의 부활이 일어나야 할텐데, 죽어서 시신이 다 분해되고 불에 타 없어진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 몸의 부활은 옛 몸과는 다른 새로운 몸, 영적인 몸으로의 부활이기 때문이요(고전15:42-4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 신앙은 기독교의 매우 독특한 특징이다. 간혹 다른 종교에도 부활 신앙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다른 종교나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는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의 영생부활과는 매우 다르다. 불교나 힌두교에서는 윤회(輪廻)라 하여 사람이 죽으면 현세에서 저지른 업(業)에 따라 다른 세상에서 다른 동물이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 살기를 반복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부활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게 윤회를 반복하는 삶은 고통에 매인 삶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 열반이나 극락왕생이란 바로 그런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궁극적 구원의 상태라고 보는 기독교와 다르다.1)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자신이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신 분이다(요1:1, 14). 그분은 죄악과 죄의 결과인 죽음과 어두움이 가득한 이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요1:4,9). 그분은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오셨다(요1:29). 그분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였던 이스라엘에 오셨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한 지도자들과 대제사장들의 배척을 받았으며(요1:10-11), 그들의 손에 붙잡혀 죄없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그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많은 사람에게 그것은 실패요 좌절이요 절망이었지만,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과 세상 사람들의 죄악을 담당시키셨고 그분은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짊어지고 고난을 당하신 것이었다(사53:4-6).
그런데 예수님은 죽으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미 예고하신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엔 제자들조차 믿지 못했던 놀라운 사건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죄악과 그 대가인 죽음에 대한 부정이다. 주님의 부활은 죄와 죽음에 대한 완전한 승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한 유대인 젊은이가 억울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얼마간 세상에 더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지만, 그들은 모두 수명이 다하여 죽었다. 예수께서 공생에 중에 살려 주신 나인성 과부의 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딸, 베다니의 나사로도 결국 다 죽었다.
그러나 부활은 영원히 죽지 않는 영원한 몸으로의 부활이다. 이런 방식으로 다시 살아난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그래서 이것은 매우 독특하고 유일한 사건이다. 이것은 인간 중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던 죄와 죽음의 문제, 그 어느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던 절대적 곤경인 죄와 죽음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 해결이다. 그러기에 부활은 죽음의 죽음이요, 죽음에 대한 영원한 승리이다.
부활은 죄악에 대한 궁극적 승리의 선언이다. 이것은 인류의 절대적이고 불가피한 절망인 죽음에 대한 완전한 승리이며 궁극적인 희망이다. 이는 인류의 참된 소망이요, 소망 중의 소망이며, 모든 절망 속에서 솟아난 신비한 소망이다. 그것은 인간으로부터 생긴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님의 가능성이요, 하나님의 소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로운 몸으로 영원히 사는 영원한 생명의 성취이며,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새로운 생명의 성취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심판을 당하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죽으셨다(막15:34).
이것은 그분의 육체의 죽음인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기에) 영적인 죽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분이 부활하셨기에 그분의 부활은 육체적인 부활이요 동시에 영적인 부활이기도 하다. 그분이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살아나셨기에 그것은 영적인 부활이요, 육체적으로도 살아나셨기에 그것은 육체적인 부활이기도 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부활을 정신적으로만 생각하여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것은 영적인 동시에 육적인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무덤은 비어 있었으며(막16:6;눅24:3),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몸으로 나타나셨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해 함께한 여인들이 부활하신 그분을 직접 보았고(요20:15-16; 마28:8-9), 시몬 베드로가 보았으며(눅24:33), 열한 명의 제자들이 그분을 목격하였고(요20:26-29),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그분을 목격하였다(눅24:13-35).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가 그 후에 일시에 500여 형제들에게 나타나셨고, 야고보와 모든 사도들과 자신에게도 나타나 보여주셨다고 증언한다(고전15:6-8).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로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그 손과 발을 보여주셨으며(눅24:39-40), 제자들 앞에서 함께 식사를 하시기도 하셨다(눅24:41-43). 물론, 그 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실 수 있어서 제자들이 문을 닫고 있던 방에 나타나실 수도 있고(요20:19, 26), 승천하여 하늘로 올라가실 수도 있는 특별한 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눅24:50-52; 행1:9-11).
만일 우리가 부활을 정신적인 부활, 그래서 그저 정신적으로 뭔가 좀 새로운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변화시킬만한 놀라운 일도 아니고, 반쪽짜리 거짓 부활 신앙에 불과할 것이다. 육체가 악하기 때문에 부활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성서적 신앙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우리의 육체는 그 자체로서는 악이 아니다. 그것이 선의 도구로 쓰이면 선이고, 악의 도구로 쓰이면 악이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창조주 하나님은 육체와 물질세계도 선하게 지으셨다. 육체와 몸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은 성서적 신앙이 아니고 영지주의적인 이단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절망과 두려움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일어나 온 세계에 나아가 목숨을 바쳐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세계를 변혁시킨 놀라운 역사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도들이 전파한 복음의 핵심, 그들의 선포(케리그마)의 핵심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었다(행2:23-24, 31, 3:15, 4:10, 5:30). 실로 부활 신앙은 기독교 복음의 가장 독특한 핵심이다. 이것은 단순한 영혼불멸의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 영과 혼과 몸을 포함하는 전인의 부활을 믿는 신앙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우리 모두의 부활을 믿는다. 우리가 우리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부활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
우리가 우리의 부활을 소망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이요(고전15:20, 23), 그리하여 부활의 본보기를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아직 부활을 경험하지 못하지만, 영적으로는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부활 생명이 약동함을 경험한다. 세례 예전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우리의 옛사람이 죽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하여 새 생명으로 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롬6:3-4).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 어떤 시련이 와도 낙심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부활을 바라보며, 그 확고한 소망 중에서 우리의 몸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서(롬6:13) 쓰임받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___ 각주 1) 참고. 구약성경의 역사의 배경이 되는 옛날 가나안의 우가릿(Ugarit) 신화에서는 바알 신(풍요의 신, 천둥과 번개와 비의 신)이 죽음의 신인 모트와 싸우다가 죽는데, 그리하여 땅에 비가 내리지 않고 가뭄이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여신인 아낫이 모트와 싸워 바알을 살려내어 다시 땅에 비가 내린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이 농사를 지을 수 있고 풍작을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죽었다가 살아나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고 신이다. 이것은 신들의 투쟁에 관한 허황된 이야기이며, 인간의 궁극적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모든 식물이 말라 죽는 것 같이 보이는 여름 건기와 비가 오고 식물이 다시 자라는 가을과 겨울 우기의 순환을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고대인들의 신화적 시도이며 농사에 도움을 얻으려는 종교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인간의 영생부활을 약속하는 기독교의 복음에 비교할 수 없다. - Copyrights ⓒ 월간 「현대종교」 허락없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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