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에 티 그리고 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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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종교 | 탁지원 소장 takjiwon@hdjongk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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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6 08:47 입력
최근 모욕과 가학적 훈련 등 여러 가지 파장으로 인해 결국 온라인에서 사라지게 된 웹 예능 ‘가짜사나이’. 조회 수가 연일 고공행진하며,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으나 이제는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짧고 굵은 흥망성쇠로만 기억될 것 같다. 예전 MBC 방송의 예능 ‘진짜사나이’를 패러디 한 ‘가짜사나이’는 ‘진짜사나이’가 유명인들의 군부대 훈련 모습을 생생하게 담았으나 ‘그것은 진짜가 아니라며 가짜인 자신들이 더 진짜처럼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 이야기만큼은 당분간 잊히지 않을 듯싶다.
언론
1. 언론에 몸담은 사람들과는 대체로 가까이 지내지 않는 편이다. 언론의 역할보다 시청률 따위 등 여타의 것만 생각하는 이들과는 필요할 때 잠시 공조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동역까지 생각할 겨를은 없다. 물론 세상 언론이든 기독 언론이든 간에 괜찮은 언론인이 적지 않다(고 믿고 싶다).
최근「국민일보」 모 기자와 교제하면서 앞의 생각을 스스로 불식시켜버린 것은 순수하고 열정 가득한 마음으로 (이단) 취재에 열정을 쏟는 모습을 보면서부터다. 아울러 인간적인 배려와 격려 때문이기도 하고. 부디 교제가 잘 이뤄지길 바라며, 앞의 선입견이 허물어지는 계기도 마련되었으면 한다. 더불어 시간이 흘러도 그가 정치나 몹쓸 것들에 휘둘리지 않길 바란다.
2. 이렇듯 어느 단체든지 최선을 다해 일하고자 하는 구성원들은 적지 않으나 속한 단체가 문제인 경우가 더 많지 않나 싶다. 위에 언급한 언론은 30여 년 전 통일교의 「세계일보」에 대항하기 위해 성도들의 후원과 기도로 만들어진 언론이다. 그러나 20여 년 전부터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받아왔던 내용 중 하나가 이단(내지는 이단성 단체나 교회)의 광고 문제라니 어이없고, 아이로니컬하다.
기사와 광고가 다른 선상에 있다 해도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울타리에 놓인 것이라면 아무리 운영이 어려워도 이단 문제만큼은 분명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매주 토요일자 신문에 이단 교회 광고가 변함없이, 같은 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창간 때부터 보아온 이 신문을 절독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한 면에는 이단 비판으로, 또 한 면에서는 이단 광고를 게재하는 것이, 이단과의 커넥션으로 지탄받고 있는 「동아일보」 같은 언론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기독 언론이라는 정당성의 획득이 서지 못함도 물론이다.
3. 「국민일보」의 광고 문제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2013년과 2014년에는 주요 교단이 이단으로 규정한 ‘다락방’ 류광수씨 측 교회들과 ‘평강제일교회’ 박윤식씨와 관련한 광고를 실은 바 있다. 또 검증되지 않은 기도원이나 신학원, 치유 집회 등이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종교면 광고로 실리고 있다.
전광훈 목사의 광고들 역시 마찬가지다. 「뉴스앤조이」의 취재에 따르면 「국민일보」 측은 “아무 광고나 싣지 않는다”면서 “광고 수위도 최대한 조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광고와 관련해 비판의 목소리가 있는 건 잘 알지만, 기사와 광고는 다르다. 기사는 기사고, 광고는 광고다. 광고주는 기사도 못 쓰는데, 광고를 통해서라도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우리가 다 실어 주는 건 아니다. 이단들도 광고를 실어 달라고 사정하지만 안 해 주고 있다”고 말했다 한다. 그러나 그 다짐은 지금껏 지켜지지 않고 있다.
✽ ‘과연 이 같은 내용의 칼럼을 써도 좋을지?’의 고민을 단번에 날려버린 것은 「국민일보」 10월 15일 자를 보면서다. 기획 란에 이단인 ‘다락방’에 대한 기사가 전면에 도배되다시피하고, 다른 기획 면에도 그동안 교계에서 말이 많았던 ‘데이비드 차’에 대한 기사가 담겨있었다. 한국교회의 지도를 받고 건전한 행보를 하겠다고 고백한 ‘데이비드 차’는 아직 명확하게 문제들이 정리되었다고 볼 수 없음에도 성급한 기사화가 몇 차례 있었기에 조금은 신중했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았나 싶다.
4. 비록 광고가 수익과 직결된다고 해도 언론사는 광고를 받을 때 신중해야 한다. 최진봉 교수(성공회대)는 「뉴스앤조이」와의 인터뷰를 통해 “언론이 좋은 기사를 쓰면 독자도 늘어나고 광고도 따라온다. 반면, 신문에 이상한 광고가 실리면 독자들은 ‘이 언론은 돈이면 다 되는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라며 “광고는 현실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합리화하는데, 언론사는 돈을 먼저 추구해서는 안 된다.
경영 문제로 아무 광고나 싣고 순간적인 유익을 쫓으면 장기적 관점에서 망할 것”이라고 말한 것에 무조건 동의한다. 물론 「국민일보」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동아일보」 같은 대형신문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고, 다른 여타의 언론들도 문제성 단체들과 ‘악어와 악어새’로 공생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교계 언론 중에도 기사 대신 광고만 가득한 언론이 적지 않고, 이단을 옹호하는 언론은 또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그러나 「국민일보」는 다르다고 믿고 싶었고, 그 마음 아직까진 유효하다. 관계자들이 이 글을 읽고 마음이 상할 수도 있겠으나 본심을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이제라도 늦지 않은 마음으로 윗선에서부터 눈물과 땀 흘려 취재한 기사들의 정당성과 그 언론이 세워진 처음의 그 거룩한 마음이 이단 등의 광고로 옅어지지 않도록 분명한 결단을 내려야 할 테다.
세 교회의 기억
#1 위의 칼럼을 쓰고 나니 오래전 집회 때 일어난 사건(?) 하나가 생각난다. 전라도 광주지역의 교회연합회 행사에 강사로 초청됐던 2000년도 초반, 당시엔 강의 때마다 신천지가 집회를 방해하곤 해서 그날도 긴장 속에서 집회가 진행됐다. 강의 첫 시작에는 늘 그랬듯이 이단 문제가 이단에만 있지 않고, 교회에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치부를 먼저 드러내며 반성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아울러 교계 언론들이 이단 광고나 기사를 게재하는 일이 많았기에 회개와 반성을 주문하고자 했다. 그렇게 강의가 진행되던 중,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모든 전원이 끊겨 버린 것이다. 다들 어찌할 줄 몰랐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그때의 상황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당연히 신천지나 이단의 방해라고 생각했기에 단상에서 나름의 대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예상 밖이었던 것이 집회 교회의 담임목사가 전원을 끊어버렸다는 거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에는 신천지를 통한 집회 방해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있었으나 아군에 의해, 장소를 제공해준 교회가 고작 속한 교단과 관계가 깊은 언론을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연합으로 다 함께 모인 집회를 막아섰던 일은 여태껏 잊을 수 없는 ‘사건 중의 사건’이었다.
더불어 「국민일보」의 이단 관련 광고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한데 얽혀 마음에서 떠나지 못하는 아픔이기도 하다. 무튼 집회는 중지되었고, 담임은 방으로 데려가 이단 광고의 증거를 대라며 고래고래 소리를질러댔다. 요목조목 증거를 대며 반박과 설명을 했더니 아무 말도 못 한채, 그저 으름장만을 놓으며 (다른 이들의 동의 없이) 결국 강사를 내쫓아버리고야 말았다. 신천지는 집회를 방해하고자 호시탐탐 매 순간을 지켜보던 중에 그 같은 호기를 놓치지 않았고, 오랜 기간 그 상황을 문건으로까지 만들어 광주의 교회들과 본지를 비난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나 그날 가슴이 더 아렸던 것은 그 상황에서, 어떤 이도 계속해서 강의를 이어가자고 말하거나 상황을 회복하고자 했던 이가 (사회자 외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오래 흘렀건만 여태껏 잊기 쉽지 않은 교회이고, 사건이다.
#2 충청남도 서산의 모 교회는 이단 문제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잦은 초청으로 뜨겁게 교제를 나눴던 교회다. 그러나 교회를 이단에 매매하는 일이 생겼고, 지역 연합회와 많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시내 중심에 세워진 교회를 매매해버리고 말았다. 한동안 먹먹하기만 했던 그 일 역시 여태껏 기억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매매 이유가 물질 때문이었다고 하니 물질 앞에 장사 없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질 않는다.
#3 마지막 이야기를 떠올리자니 앞의 사건들이 차라리 양반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수원 모 교회, 지금은 원로가 된 목사의 이야기다. 집회를 통해 교제하게 된 목사는 설교 중에 이단인 ‘평강제일교회’에 대한 비판을 했고, 이후 그 교회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고 했다.
이후 본지의 의견과 더불어 해결 방안에 대해 물어왔고, “그들은 분명한 이단이니 비판 설교는 문제 될 것이 없고, 아울러 절대로 물러서면 안 된다”는 격려와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당연히 명예훼손의 문제로도 처벌받지 않을 것이니 염려 말라고, 본지가 기도와 더불어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말했더랬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원로목사는 ‘평강제일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조건으로 그들과 화해를 했고, 고소 역시 취하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현재 그 교회는 아들이 목회의 바통을 이어받은 상태다.
순간의 어려움을 모면하고자 이단과는 손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응원해준 본지와는 연락을 끊어버렸다. 이 세 교회는 늘 한 묶음으로 기억에서 잊히질 않고 있어 오랜만에 지면에 담게 됐는데 공교롭게도 세 교회 모두 같은 교단의 교회이기도 하다. 물론 그 세 가지의 사적 경험과 기억, 겉으로 드러난 몇 가지의 일만을 근거로 그 교회의 삶이나 진실을 재단할 충분한 재료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 교회들은 여전히 ‘우리’로 한데 얽혀 있긴 하나 적잖은 낙심을 안겨준 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고, 역으로 본지를 그리 아프게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으니 알고서, 내지는 모르고 지은 죄에 대해 회개, 내지는 반성하며 더욱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담고자 해서다.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나 들추며 살진 않으련다.
✽ 위 교단 교회의 대부분 목회자와는 잘 지내는 편이다. 부디 몇 사람과 몇 교회의 문제때문에 전체 교회가 욕을 먹거나 신앙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만큼은 없었으면 한다.
✽✽ 아울러 윗글과 관련해서 작가 김규항의 글이 떠오르기에 경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담아보고자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도량이 ‘저들’의 도량보다 적다면 세상을 바꾸려는 우리의 꿈은 이루기 어렵다. 대개의 ‘우리’가 유독 자신에 대한 비판에 도량을 갖지 못하고, 대개의 ‘저들’은 자신에 대한 비판에까지 도량을 보일 수 있다면 우리가 저들을 이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싸움은 절대 선인 사람들과 절대 악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성찰이 가능한 사람들과 자기성찰이 부족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천 년 전 예수가 보여주었듯, 세상을 바꾸는 삶이란 대개 자신을 망가트리는 일들로부터 출발한다.
구독경제 (들보를 넘어서서)
코로나 19는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그중에 ‘대면과 비대면’의 구도 변화가 가장 눈에 띈다. 강의나 수업 등이 그렇고, 외출을 자제하고 재택을 하며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도 그렇다. 아울러 곳곳마다 처절한 생존이 이뤄지고 있다. 구독 경제도 그중 하나다. 신문과 잡지를 구독하는 것처럼 커피와 그림 등을 구독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선택의 여지 없이 비대면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침체된 소비심리를 구독 서비스로 끌어올리려는 시도가 소비자와 기업 모두에게 이점이 되기에 의미가 작지 않다고 본다. 구독이라고 하면 신문 등의 구독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다만 구독 서비스가 먹거리에만 집중되고 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아직은 시작점이라 할 수 있으니 먹거리 외에 더욱 유용한 것들을 만들어 가고 찾는 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여기에 「현대종교」가 해야 할 일이라면 ‘작금의 시대에 여러 정보와 자료를 어떻게 더 많은 이들에게 잘 전달하고 나눌 수 있는가?’이지 싶다. 언택트 시대에는 유튜브와 온라인으로 접근하는 이단이 더욱 늘 수밖에 없는데도 여전히 이해관계 걸려 있지 않다면 현실적인 일에만 관심을 두는 모습이 관련 자료나 책을 생산해내는 사람으로서 서운하고 아쉬울 뿐이다.
그러나 정보의 생산과 그 정보를 적극적으로 나누는 데 최선을 다했냐고 한다면 아직도 부족함이 많기에 구독의 기준이 바뀌고 있는 이때 새로운 구독 경제에 본지도 일익을 담당하겠노라는 의지와 지혜를 더해 보고자 한다. 하여 본지 50주년이 되는 내년을 다시금 출발점으로 삼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
✽ 세상 구독에는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으나 이단과의 영적 전쟁에는 유용한 기법만이 아닌 ‘더불어’의 공생이 더욱 필요할 테니 그것들을 놓치지 않는 일에도 더욱 애쓰도록 하겠다.
‘가짜사나이’는 단지 예능 유튜브일 뿐이었지만 그들의 앞의 발언이 잠시 진지한 고민을 안겨 줬다. 가짜는 진짜 같이 살고, 진짜는 가짜같이 사는 것들에 대한…. 진리를 당연히 진리라고 외치며 사는 믿음의 삶을 소망해본다.
<에필로그>
잠시 코로나를 뒤로하고 추석 연휴만큼은 ‘현종 공동체’가 몸과 마음 모두 평안할 수 있길 바랐다. 그 바람은 간절함이 되고, 결국 감사함으로 이어졌다. 연휴 전부터 많은 선물과 후원 등의 섬김이 답지했고, 말 그대로 근사한 연휴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러니 연휴 직후 온라인 토크콘서트와 11월호 작업 등 밀린 일들이 가득했으나 기쁜 마음으로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싶어 조심스럽고, 송구한 마음도 적지 않으나 아주 가끔은 현종 공동체도 이리 과분한 사랑을 받아도 되지 않나 싶다. 물론 그 빚은 늘, 조금씩, 잘 갚아나갈 것이다. 어려운 시대임에도 구독을 포기하지 않는 독자 제현께 깊은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전한다. - 저작권자 (C) 월간 현대종교(hdjongkyo.co.kr), 영리 목적의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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