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사람은 글쓰기를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한 가지 노동으로 여겨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용접공이 사람들이 건너다닐 다리를 용접하는 것처럼 지식인의 글쓰기는 사회구성원이 사용할 정신의 다리를 용접하는 일이라고. 그렇다면 믿는 이의 글은 신앙인을 포함, 불특정 다수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고 줄 수도 없는 평안과 평화를 안겨줄 수 있는 가교의 역할로 서야 하지 않나 싶다.정치와 교회, 그리고 이단예전 선거와는 달리 이번 대통령 선거의 특이점 중 하나는 보수와 진보를 딱히 가를 수 없었다는 점이다(물론 거대 정당 두 곳을 엄밀히 따져본다면 모두 보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둘 중에 나름 진보정치인으로 알려진 이재명 후보는 보수 정당의 텃밭인 대구·경북 지역을 훑으며 집중 공략을 했다. 구미의 유세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 하면 떠오르는 게 하나 있다. 강력한 추진력, 한다면 한다”라면서 “그런데 닮은 사람이 있어 보이지 않냐”면서 자신을 가리켰다. 그는 “한다면 하는, 약속한 것을 지키는 강력한 실행력이 제 장점”이라고 홍보하는 한편, “강력한 추진력은 경북 사람들의 DNA”라면서 지역 민심에 구애했다.반면 윤석열 대통령 후보(당선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신안군 하의도 김 대통령의 추모관 영정 앞에서 “김대중 정신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반을 둔 국민통합의 정신”이라며 “우리가 이 위대한 정신을 잘 계승해야 한다”고 밝혔다. 목포의 유세에서는 ‘김대중’을 15차례 언급하며 지지를 호소했는데 “유달산아 넋이 있다면, 영산강아 혼이 있다면, 이 김대중을 버리지 말아달라”는 김 전 대통령의 과거 유세문을 읊어 박수를 얻기도 했다.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놓은 이유가 절체절명의 절박하고 긴박한 선거 막바지의 순간이어서 그랬는지, 카멜레온 같은 정치인의 DNA가 있어서인지 잘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이제 정치에서 더는 진보와 보수를 나누기가 쉽진 않다는 것이다.무튼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으니 원론적인 부탁이긴 하나 진보와 보수를, 아울러 동과 서, 청년과 노인, 그리고 남성과 여성을 평등하게 잘 아우르고 통합하며 누구 하나 소외되는 이 없도록 나라의 용접일을 잘해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한가지 더는 (이미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이제라도 많은 이들이 염려하는 신천지와 각종 주술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명명백백하게 밝혀주길 바란다.교회들 역시 목숨과도 바꾸지 않을 신앙과 믿음이 정치에 밀려 뒤에 서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보수든 진보든 그 사상이야 언제든 바뀌고 변화될 수 있으나 교회는 그것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나. 상황에 따라 바뀌는 믿음과 신앙이라면, 아울러 목이 터져라 찬양하고, 눈물 뚝뚝 흘리며 기도하면서도 그 찬양과 기도가 삶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신천지 등의 이단과는 결코 타협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정치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그런 신앙이라면 당장에 그 신앙과 믿음을 때려쳐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물질이나 인맥 등이 필요하다고 해서 최소한의 정치적 의식과 고민 없이 이단이나 문제성 단체에 손을 벌리는 일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세상은 때로 우리보다 빠르다(초보 드라마 덕후의 고백)말씀에 의존하지 못하고 드라마에 기대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면 부끄럽다고 해야 하나? 그 같은 불경스러움(?)이 부족하고 연약해서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세상의 것이 때때로 믿는 이들의 위로나 격려보다 더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을 정주행하면서는 이 땅의 청소년들이 겪는 애환과 더불어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풀어보고자 동분서주하는 이들을 보며, 그간 다음 세대에 대해 생각했던 허울뿐인 소명과 다짐을 모두 지워버렸다. 처음부터 다시 이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동기부여가 생긴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세상 드라마 하나 때문에 벌어진 일을 처음에는 인정하고 싶진 않았으나 아무것도 아닌 거라고 더는 말하지 못할 것 같다.수년 전 방영된 <구해줘 1, 2>를 통해서는 이단 문제에 대한 세상 작가와 PD들의 생각과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교회가 해야할 일을 왠지 드라마가 하고 있다는 생각과 더불어 영리하게 이단과 사이비 문제를 다뤘던 것에 발맞춰 기사로도 담았고, 당시 강의 때마다 <구해줘> 특강을 진행하기도 했다. 몇몇 목사님들과 사역자들이 은혜(?)가 되기에 충분했다고 고백한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됐고, 가족과 친구, 형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20대 청년의 시절부터 일선에 뛰어들었던지라 신앙의 동지들은 많아졌을지 모르겠으나 가까이에 맘 터놓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친구가 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 가장 후회스럽다. 그래서인지 <나의 아저씨>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친구들은 비록 브라운관 안의 사람들이나 내 친구들이고, 가족인 양 즐거웠더랬다.세상 사람들도 술 한 잔 곁들이면 화해와 용서가 그리 어렵지 않게 가능하나 믿는 이들의 화해와 용서는 때로는 죽음보다 끈질기고 어려운 일이지 싶다. 한 번 싸우게 되면 교회 공동체가 두 쪽, 세 쪽이 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들을 여태껏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말로만 사랑한다고 떠들어 대는 신앙인들에게 <소년심판>의 주인공인 판사의 말을 빌려 말하고 싶다. “나는 (첫 마음을 잃어버린) 현대판 바리새파 신앙인들을 혐오한다”라고. 애증이 증폭되는 현장에서 여러 일에 환멸을 느낄 때마다 sns 등을 통해 넋두리하며 내뱉고 싶으나 대안 없는 비판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수도 있으니 앞으로 노력으로 대신하련다. 이번 지면에서는 그저 공감으로만 대신해줬으면 한다.끝으로 몇 개만 더 소개하자면, 지금 일하고 있는 곳에서는 결코 겪어보지 못한(할) 직장인들의 애환과 삶을 다룬, 치열하고도 냉혹한 현실의 문제들을 드라마 <미생>을 통해 알게 됐고 배웠다(내게 직장은 ‘현대종교’ 외에는 없었기에). 극의 대사 중 ‘아무리 빨리 이 새벽을 맞아도 어김없이 길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들이 아직 꿈속을 헤맬 거라 생각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나보다 빠르다’라는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아니! 살아내고 있다. 끝으로 신성한 노동과 노동자들의 처한 현실을 떠올리게 했던 드라마 <송곳>과 이번 선거를 치르면서는 수많은 정치 드라마들이 소환되었다.세상은 어쩌면 늘 우리보다 더 빠르고, 깊은 삶을 살며 우리의 스승과 친구가 되어가는 모양새다. 교회가 세상을 인도해주고 안아줘야 할 책무만 생각했지, 그 반대의 것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제라도 분발해야겠다.* 위의 <소년심판>을 보면서 잠시 엉뚱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만희 같은 교주들과 교회의 사건, 사고라면 깊숙이 개입해서 문제를 더욱 증폭시키고, 때로는 이단들까지 이롭게 하는 이단 옹호자들의 어린 시절이 갑작스레 궁금해진 거다. 그들도 남들과 다르지 않게 어렸을 때부터 교회교육을 받았을 게고, 순수했던 신앙의 시절도 있었을 텐데 시간이 흐르며 도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길래 세상 상식이나 종교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걸까?아울러 그들도 그들이지만 그 같은 자들에게 교회의 문제 해결을 맡기는 이들을 보노라면 한심하고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래서일까. 드라마가 주는 위로가 더 깊다고 말하는 것에 볼멘소리만 말고, 먼저는 우리 신앙의 첫 마음을 잃지 않도록 고삐를 단단히 잡을 수 있었으면 한다. 드라마보다 재밌고, 보람찬 대안들이 더 많아질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고.‘현대종교가 현대종교’ 했다최근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가 ○○○ 했다’는 식의 찬사를 자주 듣곤 한다. 누군가가, 내지는 단체나 모임에서 최고의 가치를 선보이거나 놀라운 일들을 이뤄냈을 때 이 같은 형식의 칭찬이 트렌디하게 사용되고 있다. 본지도 때마다 ‘현대종교가 현대종교 했다’는 식의 찬사를 들을 수 있었으면 하는 솔직한 바람을 굳이 숨기고 싶진 않다. 아니! 꼭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니 잘못할 때는 채찍질을 달게 받겠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더 없는 격려와 위로를 소망해 마지않는다. 교만하지 않을 정도의 자신감으로 일하되, 칭찬받는 것에 부끄럽지 않을 최선과 당당함으로 보답하련다.그런데 어떤 일에든 이 같은 찬사가 가능할까 싶다. ‘정치가 정치했다’라든지, ‘교회가 교회했다’는 식의 표현은 긍정이기보다는 부정에 가깝다. 정치야 이미 비호감이 된 지 오래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교회는 좀 달라야 할 텐데 정치와 다르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서울 강동 o교회의 직원 해고 사건이라든지, 서울 강남 ㄱ교회 담임의 윤리, 도덕적인 문제들과 서울 강동의 ㅁ교회에 이어 여수 o교회의 세습 관련 사건, 사고 등을 보노라면 교회의 긍정적인 변화가 당장은 쉽진 않은 듯하다.안타까운 것은 열심히 헌신하며 사는 교회들이 대신해서 손가락질을 받고 있어서다. 건강하고 알찬 교회들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전체가 비판을 넘어 비난받는 상황을 보노라면 안타까움은 한탄이 되고, 한탄은 절망으로 이어진다. 언제쯤 ‘교회가 교회했다’는 이야기가 긍정과 최고의 찬사로 자리매김 될 수 있을지.허나 늘 그래왔듯이 한탄과 절망으로만 끝낼 수는 없는 법, 먼저 깨닫고 행동코자 하는 이로부터 반성과 회개, 아울러 자정과 갱신이 이뤄지고, 이어진다면 언젠간 마중물의 역할을 벅찬 감사로 되뇌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선한 원동력이 선한 열매로 알알이 맺혀지길 바란다.지금 이 나라의 정신적 다리는 무너진 지 오래고, 영적인 다리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정의와 개인의 양심은 강물 속에 흩어진 잔해로만 남아있다. 교회의 정의와 신앙의 양심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 현실을 직시하여 다시금 다리를 놓으려는 분명한 태도와 실천이 필요하고, 그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본지 역시 이단 문제로 인해 끊어진 다리를 용접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데 강의와 상담으로, 취재와 글을 쓰는 일들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저 그런 이들도 아는 그런 진실과 정의와 소박한 이치를 알지 못하거나 다리를 잇고자 애쓰는 일에 적당히 고쳐 사용하자는 이들, 그리고 다리가 무너지지 않았다고 고집하는 이들이 이 눈부신 봄날, 우리를 슬프게 한다.세상은 소망하는 것처럼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하나님의 나라가 시나브로 이뤄져 가고 있음을 희망으로 삼으며, 용접공이 최선을 다해 용접하듯 우리 역시 맡은바 열심을 다하면 되지 않나 싶다. 이제 선거도 끝이 났다. 반쪽의 지지로 당선된 대통령이기에 지지했던 반쪽만 바라보지 말고 부디 넓고 깊게, 그리고 높게 전체를 바라보고 아우르며 이 나라, 이 암울한 조국, ‘대한민국’을 제대로 용접해주길 소망해 마지않는다.- Copyrights ⓒ 월간 「현대종교」 허락없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