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고난이 교회에게 각성시킨 사실 중 하나는, 교회가 외딴섬에 홀로 존재하지 않고 뉴스와 미디어로 가득한 세속 사회 한복판에 존재한다는 현실이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 속에서’ 살아간다. 코로나19의 고난은, 교회가 마치 세상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끼리 ‘복 받고 부흥하고 성장하며’ 살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각인시켰다.‘세상을 맞닥뜨린 교회’. 이것이 코로나19 이후 그리고 포스트모던(후기 현대사회)의 혼란한 사회 속에 처한 교회가 풀어야 할 도전이다. ‘세상’이란 무엇인가? 교회는 정말 진지하게 성경이 말하는 ‘세상’에 대해 배우고 가르친 적이 있었던가? 그동안 많은 교회들이 ‘죄 사함 받고, 행함이 아니라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입고, 죽으면 천당 가고, 세상에서는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도록 복을 받아 성공’하면 신앙 좋은 것으로 가르쳐왔다.복음에 대한 이런 이해와 신앙 속에서, ‘세상’이란 그저 예수 믿고 남보다 더 성공하기 위한 발판, 터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70년대 이후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급성장할 때, 교회도 ‘예수 믿고 복 받고 부자 되는 것’을 믿음의 성공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진리이든 불의이든 크게 상관없이,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는 것’을 최고의 신앙으로 가르쳐 온 것이다. 그 결과, 정말 세상에서 잘 되고 성공한 교회, 그리스도인들, 목회자들이 많이 생겼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예수 믿고 복 받아 세상을 얻으면, 세상만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얻은 ‘세상처럼’ 변해가기도 한다. 세상은 단지 ‘복’(福)으로 가득 찬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베드로전서는, 우리가 믿고 소망하는 복음의 본질을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에 간직된 유업’이라고 선포한다(벧전1:4). 뒤집어 말하면, 이 땅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세상은 그런대로 풍요하고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그 본질상, ‘썩어지고, 더럽고, 허무함’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수 믿고 복 받아 세상을 얻은 교회, 목회자,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그렇게 얻은 세상처럼 ‘썩어지고, 더럽고, 허무하게’ 변질되어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예수 믿고 복 받아 성공했는데, 그 성공 속에서 세상처럼 더럽고 썩어지고 허무하게 되어, 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고, 복음의 길을 훼방하며, 전도의 길을 막는 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가. 진지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서’ 이기는 신앙이, 반드시 ‘세상을’ 이기는 신앙은 아니다. 세상에서 이겨도, 세상에 지면 실패한 신앙이기 때문이다. 요한일서는,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묻는다(요일5:5). 예수 믿고 ‘세상에서’ 성공할 수는 있지만, ‘세상을 이기는’ 것은 쉽지 않다. 바로 여기가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교회가 힘써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이 시작되는 지점이다.교회가 ‘세상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단들처럼 ‘세상을 무조건 부인’하거나(world-denying), 인본주의자들처럼 ‘세상을 무조건 긍정’하는(world-affirming) 일방적인 태도는 교회를 쉽게 위험에 빠뜨린다. 공동서신을 살펴보면, 교회가 세상을 대할 때 ‘양방향의 태도’를 갖도록 요구함을 알 수 있다. 우선, ‘세상’은 본질적으로 ‘죄와 죽음과 하나님 없는 허무’에 갇혀 있는 곳이다. 이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예수 믿고 세상에서 복 받고 일류대학 가고 최고의 직장에 들어가도, 거기는 ‘더럽고, 썩어지고, 허무함’이 그 본질인 ‘세상 한복판’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세상에서 성공한다고, 신앙에서도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세상에서 복 받고 성공해서 망한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이고, 서구 기독교의 역사이며,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지 않은가.그러니까 ‘성공한’ 신앙이란, ‘세상에서’ 남보다 이기고 성공을 이루어낸 신앙이 아니다. 성경에서 ‘성공한 신앙’이란, 이 더럽고 썩어지고 허무한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낸 신앙’이다(유1:1, 21).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경건의 내용이다. 그만큼 교회가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내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저 복 받고 성공하면 되는 터전이 아니라, 집요하고 끈질기게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고 유혹하며 공격하고 뒤흔드는 전쟁터인 것이다.요한일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세상은 (잠시 그리고 제한적이지만) 악한 자 (마귀) 아래 놓여 있는’ 곳이라고 알려준다(요일5:19). 악한 자 마귀가 온갖 거짓 영과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 ‘거짓’으로 사람들을, 낚싯 바늘로 낚아 올리듯, 낚아채 가는 곳이라는 것이다. 거짓말처럼 사람과 가정, 공동체를 철저히 파괴하는 것이 또 있는가. 세상에서 더러운 것 중에 가장 더러운 것은 ‘거짓’이다. 그런데 세상에 가장 흔한 것이 ‘거짓말’이다.하나님이 없다는 거짓말, 하나님에게는 독생자가 없다는 거짓말,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것도 아니며 그 아들도 보내시지 않았다는 거짓말, 설혹 그 아들이 세상에 왔어도 ‘육체로’ 오신 것은 아니라는 거짓말 등이 대표적이다. 설상가상으로, ‘자기가 그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이단, 사이비들 교주들의 온갖 거짓말이 판치는 곳이 세상이다.그래서 교회가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고, 진정으로 ‘성공한 신앙, 승리한 신앙’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진리(眞理)로 자신을 지켜내야’ 한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에 관한 한, 그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고 만유의 주(主)이시다. 예수가 ‘진리’이고 ‘참 빛’이라면, 예수를 부인하는 것은 ‘거짓’이고 ‘어둠’일 수밖에 없다. 예수는 ‘세상의 빛’이다. 빛 앞에 마주 서서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는 스스로 자신이 맹인(盲人)임을 자백하는 것이다.포스트모던 사회는,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주장을 아무도 부인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 진리’로 믿고 사는 ‘자기모순’에 빠진 시대이다. 이 시대는 ‘관용’(tolerance)을 최고의 가치로 숭배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과연, 주님은 사랑이시다. 교회는 모든 ‘죄인’들을 환대해야 한다. 하지만 ‘죄’를 환대해서는 안 된다. 죄인들을 사랑하셨지만, 죄에 대해서는 엄위한 형벌을 치른 사건이 바로 십자가이다. ‘사랑과 공의의 십자가’가, 기쁜 소식이다. 거짓과 죄까지 환대하고 관용하는 것이, 사람을 구원하는 기쁜 소식이 될 수가 없다.진리와 함께, 교회를 지켜내는 것은 ‘사랑’이다. 교회는 세상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긍휼로 다가가야 한다. 또한, 거기에 여전히 빛나며 작동하는 하나님의 역사와 은총의 흔적을 인정해야 한다. 베드로전서는 세상이 여전히 ‘양심’(良心)이 작동하는 영역이라고 말해준다. 교회가 진리를 주장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양심과 상식에도 못 미친다면, 세상을 향해 진리를 전달하기 어렵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으로 창조하신 세상은, 여전히 의로움과 사랑과 선함에 반응하며, 스스로 알지 못하는 구원을 갈망한다.결국,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려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폭력에 가까울 것이며, 진리가 없는 사랑은 거짓되고 속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행하는 삶’, 그런 양 날의 검을 가진 균형 속에서 성장하는 신앙을 통해, 세상 속의 교회는 자신이 받은 놀라운 은혜와 영광, 참된 소망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지켜낼 수 있다. 그것이 성공한 신앙, 승리한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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