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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통일교를 만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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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영 목사
2019.06.14 10:33 입력 | 2019.06.12 10:30 수정

이 글을 작성한 최재영 목사는 북한을 직접 방문해 북한의 통일교 교회와 사업체를 돌아보고, 북한과 통일교의 관계와 사업체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북한에서 통일교를 만나다>를 7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북한에서 통일교를 만나다 (2)
▲⓵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문선명 총재 생가의 가장 최근 모습 ⓶2002년 가을 남측 통일교 신자들이 생가를 방문 후 기념 촬영한 모습 ⓷남측 통일교 여신도가 생가 앞에서 당시 성영일 정주시 부시장과 기념촬영한 모습(재정비 이전 모습) (사진 출처: 최재영 목사)

  

통일교 신자들의 성지, 문선명 총재 생가와 ‘정주세계평화공원’

북한에서 통일교를 만나다 (2)
▲최재영 목사
NK VISION KOREA 대표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 이곳은 통일교 설립자 문선명 총재가 태어난 곳이다. 그후 행정개편으로 지금은 ‘평안북도 정주시 덕언면 원봉리’로 주소가 바뀌었는데 북 당국과 통일교 측은 문 총재가 태어난 생가(生家)를 복원해 방문객을 맞이하는 프로젝트를 세워 이미 성지화(聖地化)했으며 생가 주변은 약 30만 평 규모로 ‘세계평화공원(평화공원)’을 조성 중이었다.

고향 마을에 거액을 투자해 평화공원을 조성한 목적은 문 총재를 홍보하고 국내외 신자들과 방문자들에게 교육장소로 활용하고자 하는데 있으며 이 생가를 거점으로 직접적으로 북 인민들에게 포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려는 목적도 있는 것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문 총재가 1991년 11월 30일에서 12월 7일까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단독 회담을 갖고 남북교류 합의서에 서명한 후 통일교는 본격적으로 북에 진출하게 됐는데 당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그의 방북은 김달현 부총리의 중간 역할로 김정일 비서의 승인 하에 은밀하게 이뤄졌으며 문 총재의 방북 일정은 모두 김정일 비서의 특별 배려였다고 한다.

또한 김 주석은 문 총재의 생가를 잘 보존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때부터 생가를 복원해 통일교 성지로 만들고 인근에 세계평화를 상징하는 종합공원을 개발하는 사업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당시 회담을 마친 문 총재는 일행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평북 정주를 방문해 자신이 태어난 생가를 방문했고 생존해 있던 혈육들과 일가 친척들을 무려 48년 만에 상봉할 수 있었다. 당시 만난 혈육은 73세의 친누나, 64세의 친여동생을 비롯해 69세의 형수와 49세의 조카 등이다.

문 총재 자신이 이산가족이다 보니 이때부터 남북 이산가족 상봉 문제에도 통일교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정주에 평화공원을 조성키로 북측과 합의한 후 귀국한 문 총재는 평화공원 조성 부지 30만 평을 구입하기 위한 재원 마련 명목으로 국내외 통일교 신자들 1인당 8만 원씩의 헌금을 받아 기금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정주세계평화공원’은 명실상부 국내외 통일교 신자들의 종교적,사상적 성향이 깃든 곳으로 발NanumGothic하는 계기가 됐으며 평안북도 정주시는 생가복원과 평화공원 조성이 결정되면서부터 격동을 맞이하게 됐다. 시 당국 차원에서 생가를 복원하고 관리하는 일과 평화공원 조성 사업에 앞장서면서 관광수입도 생기게 된 것이다. 마치 예수가 탄생한 베들레헴이 전 세계 기독교신자들의 성지순례지가 되는 것처럼 문 총재의 고향 정주가 종교적 성지가 되는데 있어서 정주시가 앞장서게 된 것이다.

1998년에는 정주에 있는 생가 인근에 세계평화공원을 조성한다고 발표되면서 통일교의 대북사업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이처럼 평화공원 성역화가공식 선포되면서 통일교 본부 측에서는 여러 명목의 특별헌금 종류를 만들어 신자들에게 공지했다. 통일교 측은 이듬해인 1999년 12월 1일, 국내외 통일교 교역자들에게 “새시대 새천년맞이 특별정성”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내 헌금납부를 강조했는데 이 공문에 제시된 헌금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총生祝(생축)헌금’은 한 가정당 1만 6천 달러 ‘천주승리 축하헌금’은1인당 1개월분 수입 혹은 한 가정당 1만 달러, ‘구국헌금’은 1인당 160만 원, ‘정주평화공원 조성기금’은 1인당 8만 원, ‘건국기금’은 한 가정당매월 17만 원...”

헌금의 종류가 다양했고 그 액수도 컸다(이 헌금 목록 내용들은 2001년 1월13일 청평수련원에서 거행된 “하나님 왕권 즉위식”에서 문 총재가 했던 말과 기도를 정리한 책에 수록된 내용들이다). 한편 평화공원 조성과는 별도로 이미 문 총재의 생가는 김일성-문선명 회담직후 북측 당국에 의해 즉시 복원되었다. 문 총재가 방북한 이듬해인 92년 8월에는 이미 219명의 외국인으로 구성된 순례단이 생가를 방문하기도 했는데 당시 순례단에 참가한 일본인 도쿠다 요시노리씨가 「세계일보」에 기고한 방북기에 따르면 “생가 본채 마루 앞에는 김일성 주석이 당대 최고의 조각가에게 지시해 만든 대리석으로 제작한 헌금함이 놓여 있었는데 그 높이가 1m가 되는 헌금용 항아리였다”고 기록했다.

문 총재 방북 이듬해에 이미 정주시차원에서 생가는 깨끗이 단장돼 있었고 진입도로도 새로 개설되었다. 최근까지 3차에 걸쳐 생가 주변이 정리됐는데 농경지 정리 작업과 진입로 확장공사를 하는 한편 생가 앞에는 관광객들과 방문자들을 위한 임시 매점이 운영되고 있다.

  

또한 2003년 4월에는 통일부에 승인을 받은 ‘평화항공여행사’에 의해 평양과 백두산 관광을 비롯해 기타 여러 관광코스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문 총재의 생가도 포함됐다. 그후 9월 들어서 분단 이후 최초로 민간인들의 평양관광이 시작되면서 통일교 신자들이 성지순례 차원에서 대규모 참가했는데 북측 고려항공이 제공한 비행기로 인천공항을 출발한 최초 관광단 114명은 모두 통일교 산하 「세계일보」 방계조직인 조사국에서 모집한 인원들이며 그 직책이 조사위원들이 다수를 차지해 통일교에 헌신하는 평신도들임이 확인됐다.

그후 2005년까지 아홉 차례에 걸쳐 4박 5일 일정의 평양관광이 진행됐고 2003년 이후, 약 5000여 명의 관광객이 항공사를 통해 방북해 문 총재의 생가를 방문했으며 그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도 해외 신자들은 꾸준히 생가와 평화공원 조성터를 방문했다.

이처럼 북에서 교세를 확장하기 위한 통일교의 전략과 정교한 계획은 하나씩 실현되고 있으며 그들의 자금과 재원은 이미 오래전부터 잠입해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문 총재가 그처럼 자신의 생가를 성지화하고 인근지역을 성역화하기 위해 공을 들인 이유는 ‘재림주 메시야’로서 자신이 ‘만왕의 왕’ 임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북한에서 통일교를 만나다 (2)
▲⓵생가 방문객들을 위한 칸막이로 만든 간이 식당 모습(재정비 이전 모습) ⓶간이식당에서 남측 통일교 신자들에게 커피를 판매하는 모습 ⓷간이식당에서 남측 통일교 신자에게 미꾸라지를 넣은 단호박찜을 판매하는 모습 ⓸생가 마루 위에는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제작된 헌금 항아리가 놓여져 있다. (재정비 이전 모습) ⓹생가 뜰 안에서 바라본 평화공원 부지 모습(재정비 이전 모습) (사진 출처: 최재영 목사)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기업과 공장들을 설립했고 이를 발판으로 재원을 마련해 교세를 확장하려던 것이다. 그 결과 생가는 이미 성역화 작업을 완료했고 그 인근은 ‘세계평화공원’이라는 명칭이 붙어 국내외 통일교 성지순례단이 찾는 코스가 되었다.

통일교 간부들은 성지조성을 문 총재가 재림주로서 지상천국을 건설해 나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보고 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문 총재는 1965년세계 순회강연을 시작으로 세계 곳곳에 통일교 성지들을 지정했고 이 장소들의 매입과 개발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 세계 도처의 미개발지역에서 막대한자금력과 지역개발을 명분으로 부동산 매입을 했는데 이는 순수한 지역개발이 아닌 문 총재가 ‘세계의 왕’으로 군림하는 통일교 왕국의 건설을 위한 과정이다.

그동안 문 총재에 의해 직접 선택된 성지는 일본에 8개, 미국에 55개,한국에 15개 그리고 기타 국가에 42개 등 모두 120여 개에 이르고 있는데 이곳 북측 땅 평북 정주에도 1991년 말부터 성지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정주세계평화공원’ 조성 공사에 대한 진척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박상권 평화센터 이사장과 잠시 만나 확인해 보았으나 사실과는 많이 달랐다.

2013년 평양에서 개최된 전승절 기념행사를 마치고 전승기념관정문 밖 입구에서 잠시 박 이사장을 만날 기회가 생겨 알아본 결과 30만 평의 부지가 조성된 것은 맞지만 아직까지 본격적인 공사는 시작하지 않은 상태이며 공원 부지에 남녀 화장실만 각각 하나씩 세운 상태라고 답변해주었다.

그가 의도적으로 축소해서 한 말인지 아니면 거짓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파악된 내용과는 상이하기 때문에 그의 발언이 의아스러웠다.

북에 설립된 최초의 통일교 공식교회당, ‘평양 가정연합교회’

통일교는 과연 북 영토 안에 자신들의 교회당을 세웠을까? 위에서 밝혔듯이 통일교의 첫 교회당은 이미 지금부터 10년 전인 2007년 8월에 보통강호텔 앞평화센터 3층에 세워져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통일교 교회가 평양에 세워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문 총재가 김 주석과 단독회담을 하는 날 협상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성사됐다. 평양에 통일교 목사의 파견을 요청한 문 총재의 요구를 김 주석이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이다. 그 결과 당시 일본인 출신 통일교 목사가 형식적이나마 평양에 체류하며 통일교 선교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통일교는 분단 이후 최초로 북에 선교사를 공식적으로 파송한 종교라는 기록을 보유하게 됐으며 반면 북측도 분단 이후 최초로 해외 선교사를 공식적으로 수용한 첫 사례가 됐다.
 

북한에서 통일교를 만나다 (2)
▲⓵통일교 교회가 입주한 평화센터를 담장 너머에서 본 모습 ⓶준공식 당시 '세계평화센터' 1층 로비에 마련된 사진전. 김일성 주석이 문선명 총재를 반갑게 영접하는 장면들이 대부분이다. (사진 출처: 최재영 목사)

  

평화센터는 매주 일요일이 되면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게 이곳에서 자체적으로 통일교식 예배를 드린다. 몇 년 전까지도 평화자동차 사장을 지낸 박상권 평화자동차 명예사장은 일요일이 되면 평양 봉수교회나 칠골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세운 통일교 가정연합교회에 출석했으며 박 이사장은 기업을 운영하는 경제인이며 경영자 신분이지만 종교에도 관여한다.

평화센터 건물을 공사하기 전 해인 1996년 2월에는 나흘간 북경에서 개최된 종교인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통일교 산하 기관인 ‘한국종교인협의회’는 종파와 종교를 초월한 초종교인들의 협의체 모임이다. 박 이사장은 경영인이 아닌통일교 종교인의 신분으로 종교활동을 해왔는데 이처럼 통일교 조직은 기업과 종교의 경계선을 구분하기 힘들다.

통일교가 평양에 교회당을 세운 시기는 2007년 8월 5일이다. 이날은 ‘평양 세계평화센터’가 준공식을 치르며 정식 개관하는 날이었는데 이 건물 3층에 교회 간판을 달고 봉헌식을 거행한 것이다. 통일교 본부는 이날을 기념해 자체홈페이지에 “지난 (2007년) 8월, 평양에 가정연합교회를 봉헌했다.

북한은 마지막 가인국(구약성경의 가인을 지칭)으로서 부모님(문선명 총재 내외)의 세계 노정의 마지막 깃발을 꽂을 곳입니다”라는 공지사항을 알리며 평양에 교회가 세워진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평양에 자신들의 교회를 세운 사실을 문선명 총재 내외와 통일교 수뇌부가 직접 언급한 사례가 있었다. 미국 알래스카에서 거행된 일명 “천일국 7년 9월 1일, 천부주의 선포 18돌 기념식”이라는 통일교 행사에서 이사실이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됐다.

이 행사는 2007년 9월 1일 오전 5시부터미국 알래스카 코디악섬(Kodiak Island)에서 열렸는데 이날 행사 진행은 양창식 회장이 맡았고 황선조 회장, 임도순 회장, 유정옥 회장, 송광석 회장, 김형태 회장, 김명대 회장 등 통일교의 주요 지도부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들은 모두 통일교 ‘국제지도자회의 및 피스킹 컵 낚시대회’에 참석한 주요 간부들이었는데 당시 참석인원이 120여 명이었다.

이날 행사가 진행되던 저녁 6시경에 황선조 회장의 보고 순서가 있었는데 전날 문 총재의 특별 지시로 마련된 특별보고였다. 이 자리에서 황 회장은 평양에 설립한 자신들의 교회에 관해 아래와 같이 자세히 언급했다. 보고내용 원본을 그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평양교회 봉헌, 가정당 창당, 200개국 신문명 개벽선포 등이 8월 달의 중요한 섭리였다. 참부모님(문선명 총재 내외)의 그 승리적 기반이 3대권에 안착이 되고, 그 후 각 단계로 선포되었고, 그 후 신문명이 창설되었고,그들이 유엔에 가입하게 되는 것이다. 9월 달 평화왕권 출발의 기준이다.또한 마지막 가야 할 곳이 평양이었고, 마지막 분야가 정치분야인데 8월에 이것을 성취한 것이다. 과거는 미래 역사를 창조하시는 것인데, 북한땅은 필연의 역사적 매듭을 풀어야 하는 땅이었다.

참부모님께서 과거 신령운동이 원산과 철산에서 일어나게 되자, 북한에 가셔서 1946년 6월부터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역사를 준비하셨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흥남, 평양, 남하노정, 부산. 1950년도 12월 4일, 38선을 넘으실 때, ‘반드시 이 땅에 다시 올 것이다. 내가 못 오면 내 자식이, 아니면 제자가 올 것이다!’라는 기도를 드린 후에 남으로 오시게 된다. 남으로 시작된 섭리가 전 세계로 퍼져갔는데 마지막 가야 할 곳이 북한인 것이다.

북한은 가인형 인생관의 마지막 땅이다. 하나님주의로통일을 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결국 김일성을 자연굴복시킨 기준이 되었다. 하나님주의의 씨를 심고 많은 교류사업을 이루어왔고, 2007년 8월에 우리 교회를 세운 것이다. 교회는 부모님의 몸이다. 북한 정부가 공인하고 정식 간판을 걸고 평양교회 헌당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부모님 의자와 존영을 놓고(문선명 총재 내외가 착석하는 왕좌와 사진을 지칭) 부모님 몸 된 삶의 결정체, 즉 부모님 삶의 전승기록인 말씀의 씨를 심고,경배를 드리고 가정맹세를 하고 첫 평양교회 예배를 드렸다.

평양에서 40일 동안 머무시는 때에(문선명 총재 내외를 지칭) 모란봉에 올라가셔서지은 성가가 2개가 있는데 성가 2장과 3장이다. 3장이 바로 그때 지었던 가사였다. 천일국 국가가 된 그 성가를 그 땅에 가서 부른 것은 감개무량하였다. 북한에 교회를 지은 것은 놀라운 것이다. 평양교회를 세운 것은 교류가 아니고, 영적인 기반을 가진 하나님 사상의 정복이라고 볼 수 있다. 땅 끝까지 가는 것이었다. 말씀의 씨가 16년 동안 성장을 하여 교회로 안착을 하였다. 말씀, 축복, 심정문화가 있는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통일교 측은 세계평화센터가 남북의 평화통일을 선도하는데 활용될 건물이라고 선전을 해왔으나 결국 그 건물 3층에는 은밀하게 통일교 예배당을 세우고 포교전략을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평화라는 이름을 내걸었지만 결국 그 건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통일교 교회당이다. 북측 당국도 타 기독교와의 형평성을 고려해서 그런지 통일교 교회당 존재여부를 공개적으로 알리기를 꺼려하는 눈치였으며 북측에서 활동하는 통일교의 가장 핵심 인물인 박상권 이사장 역시 비공개로 일관하고 있다.
  

북한에서 통일교를 만나다 (2)
▲⓵'세계평화센터' 각층 내부 휴게실 모습 ⓶'세계평화센터' 3층에 입주한 통일교 '평양가정연합교회'의 예배당 내부 ⓷'세계평화센터' 박상권 이사장이 20년 전 남북 종교인협의회에 참석한 모습, 우측은 당시 장재언 북측 종교인협의회 회장 (사진 출처: 최재영 목사)

  

통일교 교세확장과 남북통일의 상관관계

북 당국은 지금도 남측이나 해외의 기업이나 교회 혹은 선교단체에서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북측 영토에 교회당을 짓는 것을 거부한다. 북측은 교회당 건립 비용으로 차라리 문화센터나 사회복지센터 쪽으로 건축해 줄 것을 요청한다. 북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외국인들은 공식적으로 중국 영토에서 교회를 건축할 수 없다. 중국이나 북측에서 건축을 하기 위해 협상할 때는 사전에계약조항을 통해 건물 용도를 분명히 명시해야 한다. 일반건물이나 사회복지센터로 짓는다고 계약했으면서도 완공 후에는 계약내용과 달리 예배를 드리거나 종교활동을 해서는 안된다.

만일 애초부터 예배를 드리려는 목적이었다면 계약할 때부터 종교시설로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통일교 측은 중국에서의 포교를 위해 일반 건물로 건축 승인을 받은 후에 완공을 마치고 실제로 종교활동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고초를 겪은 사례가 있었다. 편법을 사용한 결과 중국 당국으로부터 거액을 압수당한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통일교는 중국에서의 실패를 발판삼아 북에서는 치밀하게 전략을 짠 결과 실제로 교회당이 세워진 것이다.

우리가 다시 한번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통일교의 모든 사회활동과 기업운영 등은 철저하게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믿기 어려운 사실이겠지만 정치, 경제, 문화, 언론, 학술, 스포츠 등 통일교의 다양한 활동 목적은 단 한가지, 바로 문선명 총재가 ‘만왕의 왕’으로 군림하는 통일교 왕국의 건설에 있다.

그동안 한반도에서 통일교 왕국을 건설하려는 문 총재의 꿈은 단 한 차례도 포기된 적이 없다. 그가 통일교 왕국을 우리나라에 건설해야 하는 이유는 통일교의 핵심 교리서인 ‘원리강론’에 잘 기록돼 있다. 통일교는 셀 수 없이 수많은 외곽 조직들을 운영해 오고 있는데 이런 다양한조직 활동에도 불구하고, 문 총재의 핵심적인 교리가 담긴 원리강론은 단 한번도 변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여러 조직을 통해 하나씩 실현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통일교 간부들의 대북사업은 아래와 같이 초지일관하며 당당하게 말한다.

“우리는 참부모님(문선명 총재 내외를 지칭)의 섭리적 측면에서 본 통일논리 때문에 대북사업을 펼친다. 공산주의는 역사를 지배와 피지배 계급간의 갈등으로 보지만 우리는 선과 악의 갈등으로 본다. 북을 변증법적철학에 기초한 유물사관과 주체사관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선한 방향으로 돌려세우는 것이 역사 속에 구원을 실현하는 한 방법이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대북사업을 통한 통일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다뤘던 통일교의 기관들은 대북 포교차원에서 설립된 종교적인 기관들이며 문 총재의 원리강론을 충실히 수행하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특히 세계평화운동과 남북통일운동, 가정회복운동 등을 수행한다는 명목으로수십 억의 자금을 투자해 건축한 평화센터는 매 층이 1000평 남짓 되는 매우넓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준공 이후로 지금까지 공익을 위해 크게 활용되지 못한 채 통일교만의 전용 공간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또한 현재 평양에 상주하는 통일교 직원들과 신자들 위주의 모임과 행사 집회를 치루는 건물 용도 위주로만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평양은 물론 북측 지역에 사는 인민들이 처음 접하는 기독교에 대한 첫 인상이 통일교에 의해 다분히 왜곡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북측 관리들과 인민들은 마치 통일교가 기독교를 대표하는 종교처럼 오인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통일교가 다른 기존 기독교를 거짓 종교라고 매도할 때 북측 주민들은 그 사실을 그대로 믿게 될 수있다. 통일교는 25년 전 김일성 주석과 문 총재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북측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자신들의 노선을 변경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리강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아직도 신자들은 “남북 분단은 가인의 세력과 아벨의 세력의 만남이고 악의 세력과 선의 세력과의 만남”으로 굳게 믿고 있으며 아직도 이교리를 신봉하고 있다.

통일교의 막강한 북 진출 사업들은 통일교의 종교적 목적 실현을 염두에둔 하나의 과정이며, 교리 내용의 변화가 아닌 포교형식의 변화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나 해외 한인교회들은 아직도 구태의연하게 북에 대한 잘못되고 왜곡된 인식과 오류투성의 대북자료와 정보를 바탕으로 선교정책을 세우고 있다. 고도로 압축된 통일교의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대북사역 전략과 비교해 볼 때, 기존 한국교회의 대북사역 전략과 노력은 매우 낭만적이고 고비용 저효율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아직도 허상을 잡는 듯하다.(다음 호에 계속)
 

북한에서 통일교를 만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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