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에 대해서 이단 기독교의 설명과 관점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된다.첫째, 예수의 육체 부활을 부인하고 영적 부활을 주장하는 부류가 있다. 둘째, 부활절을 구약의 초실절로 대치하거나 예수 부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부활 자체를 부정하는 부류도 있다. 셋째, 정통교회와 비슷하게 부활절을 지키고 예수 부활을 인정하지만 세부적인 전통이나 다른 교리에서 불일치하는 부류가 있다. 셋째 범주 가운데 안식교는 정통 기독교에서 부활절 행사에 활용하는 토끼와 계란 이미지마저 이교도 문화의 오염으로 간주하여 엄격하게 금하면서 부활절의 순수한 의미를 고수하려 애쓴다.이와 유사하게 예수의 부활 신앙은 인정하면서도 정통 기독교에서 역사적인 전통으로 지켜온 부활절은 3-4세기 이교 문화의 유산으로 의심하면서 거리를 두려는 성향도 존재한다.부활절에 대한 이러한 의혹과 비판, 다양한 해석은 오늘날의 현상만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오늘날 주류 기독교에서 지키는 절기로서의 부활절은 물론 고대 서구교회의 유산이다. 그 기본 신학적 토대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뒤 맞은 안식일 후 첫날 무덤에서 부활한 사건을 기념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그 날을 ‘주의 날’(the Lord’s day)로 지키면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린 전통으로 소급된다. 그러나 달력에 부활절(the Easter)이라는 절기로 못 박아 기독교의 중요한 전통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로마제국기 콘스탄틴 황제 때이다.구약성경에서 부활절에 대응하는 절기는 초실절이다. 봄에 수확한 이삭 한 단이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는 이 구약성경의 절기가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 되셨음을 고백하면서 자연스럽게 두 전통이 중첩되었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유월절을 기준으로 보면 유월절 다음 날인 무교절로부터 계산하여 첫 안식일 다음 날인 초실절이 이에 해당한다.그러나 서방교회에서 구약의 유월절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어 1, 2차 부활절 논쟁을 거쳐 콘스탄틴 황제 때 개최된 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춘분 후의 첫 보름 다음에 오는 주일을 부활절로 지켜왔다. 이를 태양력 날짜를 기준으로 따져보면 3월 22일에서 4월 25일 사이에 부활절이 들어오게 된다. 서방교회와 개신교가 동방교회와 부활절 날짜에 차이가 생기는 것은 전자가 16세기 확정된 그레고리력을 따르고 후자가 주전 1세기로 소급되는 율리우스력을 따라 날짜를 계산하기 때문이다.교회사적 전통 가운데 자리한 부활절의 날짜 설정과 그 배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활절의 신학적 의의와 신앙적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최초로 경험하고 신앙으로 고백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을 빼놓으면 부활절은 한갓 기독교의 문화행사나 전통 준수 차원으로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최초의 기원이 중요한 것은 예수의 빈 무덤을 확인한 목격 증인들의 신앙고백과 그 전파를 계기로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그 날을 주의 날로 지키면서 오늘날 주일예배가 기원했고, 그 주일예배의 최고 목적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기뻐하고 그의 뒤를 따라 주를 믿는 성도들이 장차 죽음을 극복하여 부활하게 되리라는 신앙고백을 확인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오늘날 과학기술시대를 맞이하면서 부활 신앙은 위기에 직면해 있다. 부활절은 교회의 1년 중 한 차례 거쳐 가는 절기 전통의 일부로 전락했고, 주일예배의 핵심인 예수 부활에 대한 감격과 그와 함께 부활하리라는 성도의 신앙적 확신도 미적지근해졌기 때문이다.이러한 의혹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 20년쯤 지나 고린도교회에서 자칭 똑똑하다는 신자들 가운데 불거졌다. 그들은 물었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가 되고 썩어버리는데 죽은 자의 부활이 상식적으로 어떻게 가능하냐고. 또 치밀하게 질문했다.설사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 할지라도 죽은 자의 썩은 몸, 썩어 흙으로 해체된 그 몸이 장차 어떤 몸으로 부활하느냐고.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매우 꼼꼼하게 변증하며 예수의 부활 신앙을 확증해 주었다. 땅에 뿌리는 씨가 죽어야 거기서 다시 생명이 싹트는 이치 그대로, 사람의 생명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으면 다시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죽은 자를 위해 세례를 받는 당대의 풍습을 살펴보면 사람들의 무의식 가운데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소망이 담겨있는 게 아니겠냐고.또 바울 사도는 구체적인 증거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난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열두 제자와 게바와 야고보와 자기 자신, 나아가 500여 명이나 되는 당시 생존해 있던 형제들의 집단 증언을 제시했다. 나아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부활이 없다면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임을 역설하였다.아울러, 예수의 부활을 믿는 신자들이 장차 썩어질 몸이 아니라 썩지 않는 ‘신령한 몸’(sōma pneumatikon)으로 다시 살게 되리라고 두 번째 질문에도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였고(고전15:44), 그 신령한 몸은 성도의 부활이 형체 없이 벌거벗은 혼령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덧입혀짐으로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 몸으로 나타나리라고 확인해 주었다(고후15:1-4).이러한 바울의 변증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도 예수께서 다시 살아난 것은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의 나타남이라고 강변하는 영지주의 사상이 일각에서 득세하면서 많은 사람의 신앙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육이원론의 신플라톤주의에 함몰된 전통으로 기독교 역사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성경의 전통과 동떨어진 것으로 거듭 논증되고 확인되었다.부활 신앙에 대한 이러한 도전은 오늘날 최첨단 과학기술의 발전 분위기에 편승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감각으로 경험되지 않는 초월적인 세계를 아예 외면하고 영원과 무한의 신적인 영역 자체를 부인하며 인간을 신처럼 떠받드는 ‘호모 데우스’의 환상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 그러한 환상이 자연계의 질서마저도 제대로 온존하지 못하여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재앙을 자초하면서도 아직 인간은 그 미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심지어 기독교 신앙인들조차 이러한 세속의 이론과 지식에 과도하게 영향을 받아 부활 신앙을 저버리고 지금, 여기서 감각할 수 있고 충분히 즐기고 누릴 수 있는 한시적인 가치에 집착하면서 부활의 소망을 약화시켜온 감이 없지 않다. 다시 성경의 부활 신앙으로 돌아가 덧없이 스러져가는 우리 인생의 실존적 위기 앞에 우리 생명의 근원을 성찰하고 그 육체적 종말 이후에도 썩지 않는 그 소망을 회복해야 할 때다.- Copyrights ⓒ 월간 「현대종교」 허락없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