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여 년 사이, 소위 ‘찬양예배’라 불리는 예배 스타일은 젊은 층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힘입어 한국교회의 주류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전통적인 예배에서 강조되는 ‘예전(禮典)’자체보다 ‘내용’을 중요시하며, 예배의 형식보다 예배의 정신이나 본질이 더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 것이 찬양과 경배 운동의 모토였다. 그러나 실제로 젊은이들에게 더 어필한 것은 간소화된 예배 순서와 문화적, 특히 음악적인 측면에 집중한 자유로운 예배 스타일이었다. 그들에게 지루하게 느껴지는 클래식 음악이 아닌 대중적인 팝 음악, 정장이나 예복이 아닌 청바지와 티셔츠, 정적이고 엄숙한 분위기가 아닌 편안하고도 열정적인 분위기의 이 젊은 예배는, 형식보다는 본질이 우위에 있다는 믿음하나로 이 모든 변화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 젊은이들은 열광했고, 기성세대는 우려했다.
그러나 변화의 불길은 거세고 빠르게 타올라 순식간에 번져갔다. 전국 각지에 찬양단이 만들어지고, 목요찬양예배 같은 정기 예배가 세워졌으며, 교회 내의 여러 반발요소에도 불구하고 예배당 안에 기타와 드럼이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라 진단하고 싶다. 전통예배에서 찬양예배로의 이양은 현대교회에 있어 ‘제2의 종교개혁’이라 할 만큼 변혁적인 측면이 있다. 교회가 음악을 비롯한 현대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하며 예배는 ‘변혁’과 ‘변질’의 기로에 선 듯 여겨졌다. 예배에 있어 ‘형식’과 ‘본질’은 감히 저울질할 수 없는 것임에도 실제 교회와 예배 시간에는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이어졌다. 이번 호와 다음 호, 2회에 걸쳐 주류가 된 찬양예배, 그 명과 암을 들여다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현대적 음악을 매개로 한 찬양예배는 실제로 매우 긍정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말씀 중심의 예배’의 구현이 용이해졌다는 점이다.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의 ‘의식(예전) 중심의 예배’는 ‘말씀 중심의 예배’로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기존의 한국교회의 예배형태는 예배의 다양한 상징과 매개들이 균형 있게 자리 잡기보다 목사의 설교에 무게 중심이 편중된, 예배의 의식화 된 틀 속에 머물러 있었으며 ‘말씀 중심의 예배’는 ‘설교 중심의 예배’로 오도된 채 고착된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설교 전에만 예배당에 들어오면 지각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준비 찬양’이라는 저열한 표현이 관용적으로 통용되었다. 선교 초기부터 한국교회에 자리 잡은 <예배 = 설교>라는 비정상적 관념은 목회자에게 과도한 권위를 부여하여 여러 폐해를 낳게 했다. 물론 목사의 설교는 예배의 중요한 요소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은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말씀에 곡조를 붙인 찬양을 통해서도 선포될 수 있다.
교독문 낭독을 통해서도, 기도를 통해서도, 성례 의식을 통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단순하고도 명징한 사실에의 간과는 예배의식 자체를 지나치게 무겁고 경직된 의식적 예배로 회귀시켰다. 그에 반해 당시 유입된 ‘경배와 찬양’이나 복음성가 중 성경 본문에 그대로 곡을 붙인 Scripture Song의 경우에서처럼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다양하고도 직접적으로 역사하는 것을 체험한 세대에게는 찬양이 주가 된 예배가 새로운 세대의 예배 대안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잠시 간증하자면, 모태신자로 살아오면서도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던 철학과 1학년 당시 필자가 찬양예배에서 ‘목마른 사슴’을 부르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마주했다. 시편 42편의 말씀은 Martin Nystrom이 만든 아름다운 멜로디와 어우러져 나를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에 데려다 놓았다. 이런 체험은 비단 필자만의 것이 아니었고 수 많은 예배자들에게 공유되었다.
둘째, 예배의 역동성을 회복하게 했다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존의 ‘설교 중심의 예배’의 의식성은 성도가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가 현저히 부족했으며, 설교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를 일방적,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의 반복을 통한 지성과 의지의 성숙과는 달리 엄연한 하나님의 선물인 감성의 표현은 엄격히 제한되는 듯 보였다. 여기에 현대적 음악을 매개로 한 경배와 찬양 운동은 의식화된 기존 예배의 경직성에 생동력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사운드의 증폭이 중요한 특징인 현대음악의 예배로의 유입은 기성세대에게는 다소 강하고 자극적이었을지 모르나 젊은 세대에게는 자신들의 기호와 필요에 공명하는 것이었다. 박수를 치고, 몸을 흔들고, 손을 들고, 춤을 추며, 소리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성경에 명시된 성도의 당연한 의무이자 특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불경한 것으로 오도되던 한국교회 전반의 낡은 부대 속으로 새로운 바람이 불어 든 것이다.
다양한 악기와 음악 장르의 유입은 예배의 ‘엄숙’이 아니라 ‘축제’이며, ‘억압’이 아니라 ‘자유’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음악은 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최고의 찬양을 받을 만한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루터의 지적은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에게는 거의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현대 음악을 매개로 한 경배와 찬양 모임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고 그들이 흩어져 개 교회에 찬양예배를 만들었으며,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가장 일반적인 예배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영지정의(靈知情意)가 균형 잡힌 예배와 신앙은 개혁교회의 인간의 목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의 적극적 구현을 가능케 했다.셋째, 음악을 통한 문화 선교 사역의 접촉점을 발견하게 된 점이다. 경배와 찬양, 복음성가와 더불어 더더욱 대중적인 음악인‘(협의의) CCM’이 교회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며, 교회음악은 더 이상 교회만의 음악이 아닌 세상을 향한 음악이 된다. 음악 선교단이라는 이름으로 생겨난 수많은 팀들(물론 현재에 이르기까지 흥망성쇠를 겪게 되지만)은 음악을 매개로 세상과의 소통 가능성을 모색, 시도하게 되고 실제로 효과적인 선교 전략으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복음성가 가수, CCM 가수 등의 이름으로 음악 사역자들이 활동을 시작하며 사역의 현장이 교회로부터, 학교와 직장, 거리와 소외받는 곳으로 확대되어 갔다. 실제로 90년대 중반을 즈음하여 많은 CCM 아티스트들이 크로스오버를 시도하며 일반 음악시장의 문을 두드렸고, 결과는 신통치 않았으나 그 시도 자체는 지지받을 만했다.
‘한 톨의 사랑되어’같은 아프리카의 기아를 돕기 위한 프로젝트는 대중가수와 찬양사역자가 함께 어우러져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 냈고, 문화 사역과 구호 사업을 선교적 대의 안에 녹여내는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더불어 교회 내부에서도 세속적인 문화의 대안 문화로써의 작용 또한 중요했다. 현대적인 찬양에 대한 젊은 세대의 반응은 가히 뜨거웠다. 현대적인 음악의 수용과 활용은 정서적 과도기를 지나며 입시와 취업에 시달리던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가장 효율적인 신앙 교육 방식이자 자아발현의 장이 되어주었고, 여기서 새로운 꿈을 키워낸 젊은이들이 자라나 실제로 사회, 문화, 예술 각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영향력을 끼치게 되기도 했다. 이런 긍정적 영향과 더불어 찬양 예배가 안고 있는 단점 또한 충분히 고찰되어야 한다. 전통예배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유산들이 자칫 구닥다리로 전락되는 것은 충분히 경계해도 모자라지 않다. 현대 문화의 수용은 ‘발전’이지만 동시에 ‘퇴락’일 수 있기에 교회는 신중해져야 한다. 더욱이 그것이 예배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