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이 사는 세상이 가장 복잡한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잡한 현대 사회를 살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복잡한 상황 속에 있다고 느끼지, 이제는 좀 정리된 상황 중에 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 작업하면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역사적 결과를 낸 사람들은 역시 개혁자들(reformers)이었습니다. 왜 그들의 사역이 의미 있었는지 간단히 생각해 보겠습니다.첫째로, 그들은 이 세상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사역이 성공하리라고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도 이전에 비슷한 말을 하시던 분들과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매진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순교하든지, 아니면 미약하게나마 주께서 하라고 하신 개혁을 이루든지. 당연히 그때도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올해로 450주년이 되는 성 바돌료뮤 대학살(1572년 8월 24일)에서 죽은 3000여 명과 수많은 유그노들의 순교와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개혁자들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둘째로 “오직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믿고, 예배하고, 사는 일”이 최선의 관심이었습니다. “성경과 전통”이라는 이전의 천주교적 방식에서 벗어나 “오직 성경”을 생각할 때, 믿는 것의 변화, 예배 방식의 변화, 삶의 방식의 변화가 강하게 요구되었습니다. 습관에 익숙한 존재인 우리들은 우리들이 믿고 예배하고 사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강한 저항을 가지고 있습니다.그런데 개혁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유일한 판단의 기준이었기에 성경에 있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고 명확히 단언했습니다. 그 결과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사람이 구원받은 것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을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이신칭의”의 가르침이 성경적 가르침인 것을 아주 명확히 하면서 비성경적인 “이중 공로”에 대한 가르침을 버렸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일의 출발점이었습니다.그로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믿고 있는 모든 것을 성경에 비추어 점검하여 연옥에 대한 가르침이 성경에 있지 않으니 이를 배제하고, 모든 제사를 완성하신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더이상 제사드릴 것이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예배를 제사로 표현하는 것을 다 버렸습니다.물론 이것에 좀 더 충실하던 칼빈과 그를 따르는 분들이 같은 개신교단이지만 루터파나 성공회 안의 아직도 잔존해 있는 여러 천주교적인 잔재들을 지속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루터파와 성공회와 감독교회에서 지금도 사용되는 “사제(司祭, priest)”라는 용어까지 다 제거하였고, 목사님들이 모든 목회를 다 하려 하지 않고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다 장로라고, 또한 다 같이 감독으로 불렸다는 성경적 원칙에 따라가려고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더 철저하다고 자랑하는 것에 있지 않고, 그 정신이 우리에게 참으로 있느냐입니다. 그 성경대로 하는 정신에 충실하지 않으면 우리 선배들이 상대적으로 잘했다고 해도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마지막으로 개혁자들은 좁은 의미의 종교적인 것만을 변혁하려 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일에 늘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온 세상의 구조를 바꾼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뛰어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에 충실하다 보면 자연히 온 세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모든 것의 변혁을 향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주변의 지극히 작아 보이는 것도 일일이 성경에 비추어 성경에 옳다고 하면 그 방향으로 가려 하고, 성경에 허용하지 않으면 없애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나라가 제대로 되어 가기를 바라면서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을 생각하다가 개혁자들의 모습을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라를 위해서도 이 길만이 최선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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